남김없이 드러내고,
거침없이 고발하며 완성된
가장 사적이고 보편적인 주체의 탄생!
제3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제3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캣콜링』이 민음의 시 253번으로 출간되었다.(심사위원 김행숙, 정한아, 조재룡) 2014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소호 시인은 첫 번째 시집 『캣콜링』을 통해 가장 새로운 ‘고백의 왕’을 선보인다. 2018년에 탄생한 ‘고백의 왕’은 성폭력의 유구한 전통과 끔찍한 일상성을 폭로한다. 『캣콜링』을 통해 세상에 나온 시적 화자 “경진”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 낱낱이 펼쳐 보이며 가부장제와 폭력적인 일상에 거친 조롱을 뱉어 낸다.
고발과 폭로를 통한 심리적 진실이 시집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내면의 고통을 예술 작품으로 분출해 내는 ‘전시적’ 진실이 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니키 드 생팔 등 현대 여성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시편들을 미술 작품처럼 배치하고 사진과 그림, 타이포그래피 등 시각적 효과를 적극 활용한 이미지를 통해 독자들이 고통과 폭력의 현장을 다층적으로 마주하도록 한다. 거칠고 공격적이면서도 지적인 이소호의 시 세계는 격정적이고도 이지적인 시인들의 계보를 새롭게 이어간다. 이제 시집 『캣콜링』이 놓아 둔 카펫을 따라 경진의 전시관으로 입장할 시간이다.
■ 아카이빙의 시, 아카이버로서의 시인
동생이 일기를 쓸 때
나는 낯선 우리에 대한 시를 쓴다
지긋지긋하게 우리로 묶이는 그런
시를
―「마이 리틀 다이어리―경진이네」에서
경진은 일기를 쓰듯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써 내려간다. 유년 시절의 작고 낡은 집과 그 안의 가족, 성인이 된 뒤 만난 남자들까지 경진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시간과 공간을 부지런히 쓴다. 차곡차곡 아카이빙하듯 기록된 사소하지만 명징한 침범들은 누구도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속도로 그녀를 잠식한다. 경진의 동생은 “내가 꼭 너보다 먼저 죽을 거야”(「복어국」)라고 말하며 구더기를 씹고, 경진은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에게 “여자들은 정말 이상하지. 멀쩡히 잘 만나다 꼭 이러더라. 됐어 기분 다 망쳤어.”(「마시면 문득 그리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폭력의 사슬은 영원히 끊어 낼 수 없을 것처럼 주위를 맴돈다. 『캣콜링』에 저장된 폭력의 아카이브에서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폭력의 경험들을 쓰는 경진의 기록은 잠복된 에너지를 시로 표출한다.
■ 당사자만 존재하는 내밀한 세계
너 같은 거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엊그제 내가 프라이팬으로 네 머릴 친 건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 알겠지 언니는 맞아야 말귀를 알아듣는 거 같아
―「우리는 낯선 사람의 눈빛이 무서워 서로가 서로를」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를 맺고 있을까. 경진 역시 지긋지긋하게 우리로 묶이는 수많은 관계 속에 있다. 그 작고 내밀한 세계는 거친 폭력으로 점철된 곳이다. 언니를 살코기만 발라 먹고(「시진이네―죽은 돌의 집」), 동생의 손목을 대신 그어 주고(「동거」), 온 가족의 손바닥을 제기 위에 두고 못을 박는(「경진이네―5월 8일」)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진다. 이 관계에서 제3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 오직 피해자가 아니면 가해자가 되는 ‘당사자의 세계’이다. 맞거나, 혹은 때리거나. 언니를 프라이팬으로 때렸다는 사실마저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희미해져 가지만 당사자의 자리에서 읽는 시는 우리의 숨을 조이며 육박해 온다. 관망자의 자리를 완벽히 지워버린 곳에는 직접 겪은 듯한 생생한 진실만이 있다.
■ 겨누는 시
캔버스에 이미 찢어진 집을 그린다
모서리를 그린다 모서리 안에 지퍼를 잠글 줄 모르는 아빠를
가둔다 영원히
―「나나의 기이한 죽음―페인트와 다양한 오브제」에서
『캣콜링』의 정점은 단연 4부 ‘경진 현대 미술관’이다. 루이스 부르주아, 니키 드 생팔, 실비아 슬레이, 트레이시 에민등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작업에 몰두했던 현대 여성 미술가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시가 묶여 있다. 시인은 그들의 작업 방식을 통해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재현한다. 실비아 슬레이가 남성 누드를 그림으로써 여성들이 캔버스 위에서 당해 오던 성차별을 폭로했던 것처럼 폭력적인 성관계 내의 피해자 여성이 “원래 끝까지 너만 좋아?”라고 외치며 침대를 박차고 나온다. 이때 우리는 경진의 말 한마디가 아닌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구조와 상황을 본다. 하나의 미술 작품을 바라보며 여러 함의를 짐작해 보듯 시가 그려낸 현상 너머의 진실을 가늠한다. 이소호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떤 것도 발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캣콜링』을 덮은 뒤 우리는 희미했던 불행의 징조들을 더욱 명징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