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폴란드 문학의 ‘앙팡 테리블’
브루노 야시엔스키 국내 초역
정보라 작가가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었던
20세기 유럽의 문제작
“시대를 앞선 미래주의 걸작.”
─<컬처 트립>
“야시엔스키에게 재난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기회다.
그가 창조한 이 환상의 공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뮤트 매거진>
전염병이 휩쓰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반동과 혁명
현대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텍스트
폴란드 미래주의 문학의 기수이자,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글쓰기를 실천한 시인·소설가·극작가, 그리고 공산주의자인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야시엔스키는 폴란드 아방가르드 문학의 기수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작품 색 때문에 박해를 받아 프랑스로 이주, 프랑스에서 다시 추방되어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했다. 소련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강제수용소에서 결국 사형당해 37세의 나이로 불꽃 같은 삶을 마무리했다.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전염병이 휩쓸어 폐허가 되는 ‘유럽의 심장’ 파리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 보이며 다양한 이들이 섞여 사는 자본주의 대도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담하게 사고 실험한 작품이다.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파리에서는 인종·계급·이념에 따라 수많은 공동체가 분리되어 자치정부를 세우고 외부의 출입을 봉쇄한다. 급변하는 상황은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전복을 도모할 기회가 되고, 이 틈을 타 억눌렸던 야심들이 치열하게 충돌한다. 혁명에 대한 강렬한 신념과 노동민중에 대한 믿음을 거침없이 드러낸 이 소설은 야시엔스키가 프랑스에서 추방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도시 봉쇄와 감염자 격리가 일상화되었던 2020년대 초, ‘암울한 예언’ 같은 이 책은 영미권의 애서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책은 한강 이후 서양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정보라 작가가 기획·번역을 맡았다. 정보라 작가는 20여 년 전인 대학원생 시절 이 작품을 발견해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간직해왔다(<작은 종말>은 정보라 작가가 이 소설을 오마주해 쓴 단편이다). 정보라 작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답게, 이 책 역시 기이하고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이 살아 숨 쉬며 격동하던 20세기의 뜨거운 에너지를 생생히 담아낸,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문제작이라 할 만하다.
‘유럽의 심장’ 파리의 몰락
그 폐허에서 자라는 유토피아의 가능성
실직한 공장 노동자 피에르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만 프랑스의 경기가 좋지 않아 번번이 실패한다. 해고된 이후로 여자친구 자네트도 만날 수 없다.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던 피에르는 자네트가 잘 차려입은 뚱뚱한 남자와 호텔에서 나온 모습을 본 것만 같고, 증오심에 가득 차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한다.
프랑스의 혁명기념일, 파리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고 도시는 혼돈에 빠진다. 분리주의 분위기가 팽배한 파리에서 다양한 집단의 정치·종교적 지도자 혹은 세력가가 차례차례 작품의 전면 인물로 등장한다. 공산주의 활동가인 중국인은 프롤레타리아 파리를 꿈꾸며 황인종 공화국을 세운다. 유대인 구역의 지도자 랍비는 유대인 구역을 봉쇄하고,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미국 자본가에게 접근해 미국으로의 탈출 계획을 세운다. 러시아제국 고위 장교의 아들이었으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던 백계 러시아인은 러시아제국 자치령 건립을 계기로 권력을 잡는다. 소설은 국적·계급·정치성향이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그들의 일대기를 풀어나간다.
전염병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던 이 소설은 결말부에서 뜻밖의 돌파구를 만들어낸다. 재난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희생시키지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기회이자 사회를 변화시킬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이,
야시엔스키의 독창적 글쓰기와 사유
폴란드에서 브루노 야시엔스키는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를 장려한 미래주의자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실험적인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그러다 1923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동자 봉기를 계기로 그의 작품은 혁명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이후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급진적 관점의 글을 썼고, 소련으로 이주한 후로는 공식 문화예술 사조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야시엔스키가 미래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후,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쓰인 작품이다. ‘아방가르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한가운데 놓인 이 작품은 미래주의자다운 전위적·실험적 면모를 담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적·혁명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야시엔스키만의 대담한 정치 사변을 펼쳤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운 오늘날, 우리는 무심결에 현 체제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시대에 20세기 어느 혁명가가 뜨겁게 상상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용기를 일깨운다.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우리의 힘은 더 멀리 뻗어갈 수 있다.
“야시엔스키가 보여주는 이상 사회의 모습은 (…) 보편적이고 원초적이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자연이 생기를 띠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곳, 모두가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드는 곳이다. 누군들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팬데믹을 겪었고,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겪어냈고, 기후위기와 자연재해 속에서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이 죽는다. 건강하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특히 대한민국이 커다란 혼란을 이겨내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있는 만큼, 정치와 권력을 넘어선 이상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해 보인다.”─정보라(<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