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코끼리가 틀림없지만,
아무도 본 적 없는 코끼리들이 나타났다!
시각 예술가와 시각 장애 아이들이 만나 펼쳐 내는
예술과 창의성에 대한 경이로운 이야기
2023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박서보예술상을 수상한 엄정순 작가가 독특한 그림책을 냈다. 『코끼리를 만지면』은 엄정순 작가가 10년 넘게 이끌어 온 예술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다’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그림책으로, 시각 장애 학생들이 코끼리를 상상하고, 찾아가 만져 본 뒤, 예술가들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흥미롭게 담아냈다.
상상에서 체험, 그리고 창작에 이르는 예술적 여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지만,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아이들과 예술가가 함께 완성한 작품들이다. 손끝의 감각을 시각 이미지로 형상화해 낸 작품들은 누가 봐도 코끼리지만, 흔히 상상하는 코끼리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엄정순 작가는 『열반경』에 나오는 ‘맹인모상(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전복함으로써, 장애에 대한 편견을 유쾌하게 뛰어넘고, 예술과 창의성 그리고 공감과 협력의 힘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엄정순 작가는 예술가로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늘 품고 있었으며, 그 궁금증에 이끌려 맹학교에서 오랫동안 미술 교육을 해 왔다. 『코끼리를 만지면』에는 시각 장애인 미술 교육을 개척해 온 엄정순 작가의 오랜 경험과 예술적 통찰이 스며들어 있다. 회화와 사진, 조각이 어우러진 이 독특한 그림책에서 보편적인 언어로서 예술의 위대함, 협업 속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낯선 존재에 공감하는 힘과 생각하는 힘, 즉 상상력의 결과물입니다. 창조의 세계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핍도 무거워하지 않습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코끼리를 만지면』은 시각 예술가와 시각 장애 아이들이 함께 만든 작품을 바탕으로, 예술과 창의성의 본질에 다가가는 그림책 시리즈 ‘엄정순의 예술 수업’의 첫 번째 책이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감각을 일깨운다.”
2023 광주비엔날레 수상 작가 엄정순의 그림책
송수연, 고병권, 이동섭 추천
코끼리를 상상하고, 찾아가 만져 보고, 표현하기까지
그 예술적 여정의 마디마디, 반짝이는 창의의 순간들
불경 『열반경』에는 맹인모상(盲人摸象)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왕이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하고는 코끼리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코끼리 이빨을 만져 본 이는 코끼리는 무 뿌리와 같다고 했고, 귀를 만져 본 이는 키와 같다고 했으며, 꼬리를 만져 본 이는 노끈과 같다고 했다. 맹인모상은 자기가 아는 세계만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경계할 때 쓰인다.
예술가 엄정순에게 와서, 맹인모상은 전복적인 프로젝트로 탈바꿈했다. 코끼리를 만져 본 이는 어리석은 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창의적인 사람이다. 『코끼리를 만지면』은 시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유쾌하게 뒤집어 버리는 이야기이자, 창의성과 예술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엄정순 작가가 25년간 지속해 온 시각 장애인 미술 교육, 그중에서도 10년간 지속해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한다. 이 프로젝트는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먼저 예술가와 아이들이 코끼리에 대해 묻고 답하며 상상한다. 코끼리를 얼마나 클까? 코는 얼마나 길지? 코끼리는 뭘 먹고 살까?
코끼리를 상상한 뒤, 이번에는 진짜 코끼리를 만나 볼 차례다. 아이들은 바다 건너 태국까지 직접 코끼리를 찾아가기로 한다. 굳이 머나먼 길을 떠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상상력은 많은 자극과 경험에서 자라납니다. 실체와 만나는 경험은 잠재되어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건드리는 탁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코끼리를 만나야 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태국에서 아이들은 코끼리 냄새를 맡고, 코끼리와 함께 산책하고, 코끼리를 만져 본다. 직접 대면하고 손끝으로 감각해 본 코끼리는 어떤 모습일까? 다시 돌아와 창작에 몰입하는 아이들. 예술가와 함께하는 창작 과정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코끼리들이 탄생한다. 틀림없이 코끼리지만,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코끼리들이 그림책 가득 펼쳐진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본 적이 거의 없어 기존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감각에 충실한 아이들, 다른 감각을 통해 시각 이미지에 다가가는 아이들의 코끼리 작품은 제각각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 남다름이 깊은 감동을 전한다.
『코끼리를 만지면』에서 예술가와 아이들은 꾸준히 대화한다. 아이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예술가는 아이가 경험한 것을 떠올리고 그 느낌을 표현하도록 북돋운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의 응원과 자극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아이의 성장이 오롯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코를 만지는데 손이 콧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어요. 끈적거리고 무진장 컸고 그 속에서 바람이 불었어요.” (본문 중에서)
상상력은 낯선 존재에 대한 공감, 그리고 여럿이 함께하는 협동을 통해 더욱 큰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책이다. 예술 교육과 창의성, 그리고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대담한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