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의 기자이자 저널리스트, 르포작가이자 시인인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Ryszard Kapu?ci?ski, 1932-2007)는 평생 낯선 공간, 미지의 세계를 떠돌며 민족과 문화, 종교의 명목으로 만들어진 소통의 장벽을 허무는데 자신의 생을 바친 인물이다.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취재를 담당하면서 총 27회의 혁명과 쿠데타를 직접 경험했고, 12회의 대규모 전쟁을 취재하는 동안, 여러 차례 최전방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 사이 40여회에 걸쳐 체포와 구금을 당했고, 네 번이나 처형의 위기도 겪었다.
투철한 기자정신과 전문적인 역사적 지식,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감수성을 두루 겸비한 카푸시친스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세상을 글로 구현해내는 과정에서 ‘르포르타주 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독자들에게 지구촌 방방곡곡의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적인 감수성을 일깨우고, 풍요로운 문학적 체험을 제공하는 그의 작품은 결국 수백, 수천가지 정보나 팩트의 전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진심과 열정, 그리고 끊임없는 탐구와 고찰이라는 점을 깨우쳐준다.
아프리카 대륙은 카푸시친스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1958년부터 1994년까지 여러 차례 아프리카를 오가며 겪은 다양한 체험은 『검은 별 (Czarne Gwiazdy』(1963), 『만일 모든 아프리카가... (Gdyby cała Afryka...)』(1969), 『황제(Cesarz)』(1978), 『흑단 (Heban)』(1998)과 같은 명저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저력과 끈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카푸시친스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흑단』에서 저자는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왜곡된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다. 첫째는 아프리카를 문화적으로 열등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미개한 영토로 단정짓는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지탄했고, 둘째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입각해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시각으로 아프리카를 인식하고, ‘잃어버린 파라다이스’로 섣불리 미화하려는 의도를 비판했다.
카푸시친스키는 단순히 취재여행으로 아프리카를 다녀갔던 여느 기자들과는 달리, 수년에 걸쳐 아프리카에서 직접 살았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깥에서 아프리카를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의 삶의 일부를 그들과 기꺼이 나누었던 것이다. 카푸시친스키는 유럽인들이 거주하는 안락한 호텔을 거부하고, 아프리카인들의 삶 속으로 몸소 뛰어들었다. 아프리카인들의 고물 트럭에 몸을 실은 채 광활한 대륙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유목민들과 더불어 사막을 떠돌기도 했으며, 열대 사바나에서는 농부들의 오두막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고독’을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로 간주하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오랜 시간 한데 어울려 지내는 동안, 카푸시친스키는 어느덧 ‘백인’으로서의 이질감이나 소외의식을 떨쳐버리고, 문명의 이기가 규정지어 놓은 편협한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흑단』에서 카푸시친스키는 학문을 통해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아프리카인들의 무한한 지혜,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아프리카의 옛 신화, 타오르는 뙤약볕 아래 척박한 영토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하늘과 땅,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네들의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거대한 산업 사회에서 기계적인 일상에 함몰된 채 한낱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현대인들에게 묻는다: 그래서 과연 당신들은 행복한가. 『흑단』을 읽는 독자들이 카푸시친스키와 개인적인 체험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 풍요나 문명의 발전이 반드시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흑단』의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아프리카는 어느 새 우리에게 낯선 별천지가 아니라 보다 가깝고 친근한 땅으로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카푸시친스키는 『흑단』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시사적인 문제를 언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책은 어떤 사안이나 쟁점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상세한 배경설명과 더불어 역사적인 고찰을 시도하는데 주력한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고, 여러 세기를 넘나들며 폭넓은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하게 된 유래에서부터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아프리카 영토가 분할되는 과정, 아프리카인들의 독립 운동사에 이르기까지 대륙의 역사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저자 스스로가 모두(冒頭)에서 밝혔듯이 “아프리카는 살아있는 대양이고, 별도의 혹성이며, 다양하고 광대한 코스모스”이다. 그 광활한 대륙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 속에 담아내고자 저자는 한 장에서 또 다른 장으로 넘어가는 동안 다양한 시공간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나라와 정부, 지역과 풍경이 급격하게 바뀌고, 30여 년에 걸친 시간의 경과도 숨가쁘게 전개된다. 오랜 글쓰기의 소산으로 단련된 카푸시친스키의 문체는 담백하게 정제되어 있으며, 최대한 간결하게 압축되어 군더더기가 없다. 독자들은 카푸시친스키가 이끄는 대로 가나와 잔지바르, 열대의 초원과 사막, 여러 도시와 마을, 촌락들을 부지런대의오가면서 다양한 간접 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날짜별로 사실만을 기록한 <쿠데타에 대한 탐구>나 강연문의 형식으로 딱딱하게 기술한 <르완다에 대한 강연>과 같은 장에서 카푸시친스키는 여느 장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또 다른 글쓰기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의 참상, 혹은 처형과 숙청으로 얼룩진 잔인한 쿠데타의 현장처럼 문학적인 묘사나 미학적인 재현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감상을 배제하고 팩트의 전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냉철하고 건조한 문체를 고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서’나 ‘강연문’의 형식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압달라왈로 마을에서의 하루>와 같은 장은 그대로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밝고, 서정적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황무지인 압달라왈로 마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존과 소멸의 갈림길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 소녀들은 아침마다 물을 길어오고,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여자들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 또한 그들은 아침마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이웃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간밤에 잘 잤는지, 안부를 묻는다. 삶의 조건이 열악하고, 척박한 곳일수록 그곳에서 끈질기게 버텨내는 생명들은 경이로운 법이다. 힘겹고 지난한 상황 속에서 이처럼 밝고 긍정적인 자세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흑단』에서 카푸시친스키는 이른바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현대인들에게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 윤리와 죄악, 자긍심과 굴욕감, 운명에 맞서는 투쟁과 그에 순응하는 태도는 어떻게 다른가? 강대국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우리 또한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카푸시친스키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세상에서 그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사막에서 헛되이 우물을 찾아 헤매던 인간은 어째서 자신의 낙타와 더불어 기꺼이 죽음을 맞으려 하는가? 대도시의 현대인들이 고질적인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고독’을 아프리카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두렵고, 끔찍한 불행이라고 여기는가? 가족이나 피붙이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작정 고생스런 방랑길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목민들은 어째서 생계수단이 보장된 난민 캠프로부터 도망쳐 나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으로 돌아가려 애쓰는가? 카푸시친스키의 아프리카인 친구는 자포자기나 체념의 기색보다는 자부심이 담긴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바로 우리의 본성이니까요.”
본성이란 함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해서도 안 되고, 억지로 고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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