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ㆍ서점ㆍ출판인이 선정한 올해의 책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한국소설 1위
악惡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정유정이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이기에 이번 신작을 향한 독자들의 기대는 그 시간만큼 높았고, 출간과 동시에 전 서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며 열광적인 지지와 호평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 선정 올해의 책 1위, <조선일보> 선정 올해의 책 2위, 각 서점과 출판인 선정 올해의 책,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소설 1위에 올랐다
작품 안에서 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선사했던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 정유정의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빛을 발한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신작 《종의 기원》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유정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악’에 대한 한층 더 세련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라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_‘작가의 말’에서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는 것이 사건의 시작이고, 그 ‘누군가’를 밝히면서 드러나는 진실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과거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사흘(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흐를 뿐이지만, 독자들은 아주 낯설고도 특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악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은 밖이 아니라 여기,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문장, 앞뒤로 꽉 짜인 이야기 구조가 발휘하는 특유의 속도감과 흡인력은 여전하다. 다만 서사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대신 1분1초도 헛되게 쓰지 않는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로 밀도감과 긴장감을 증폭시켰고,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깊어졌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한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가 바로 나다!”
주인공 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유진이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해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10년 전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은,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_ 본문 139쪽
16년 전, 열 살의 유진은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주목받는 수영선수였던 열여섯 살의 유진은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어머니는 유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밤 외출 후에는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단서들을 따라 지난밤의 기억들을 확인해나가던 유진 앞에, 시간을 거슬러 망각에 가려졌던 끔찍한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_ 본문 283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로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살인’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는 데이비드 버스의 논리는 살인과 악, 나아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곤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의 어둠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묘사해 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감으로써 비로소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를 완성시킨 것이다.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길고도 깊은 잠을 잔다. _ 본문 283쪽
작가는 우리의 본성 안에 숨은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의 이야기가 그 어떤 낯선 세계의 이야기보다 낯설면서도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하고, 다양한 해석의 결로 저마다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