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정병설 · 역사/인문학
4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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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강의’ 중 매주 수요일 연재된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 죽음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꼼꼼히 읽어나가 많은 독자가 ‘역사 인식의 틀’을 넓힐 수 있게끔 이끌었다. 총 48회로 진행된 ‘권력과 인간’은 2011년 12월, 그동안 인문학 강의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갈증을 채워주며 조회수 4만 2천여 회, 댓글 수 5천 개 이상의 기록을 남기며 성공리에 끝났다. 이번 책에서 그는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과정,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1세기 동안의 역사를 두루 다룬다. 이렇게 폭넓게 궁중사를 소개한 것은 사도세자 죽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배경과 경과, 나아가 그에 대한 담론의 변화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주위에 분노를 폭발했던 비정한 임금 영조, 그런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평생 울화를 가슴에 안고 쓸쓸히 살았던 왕비 정성왕후, 영조의 후견인이지만 때때로 그와 심한 충돌을 빚었던 대비 인원왕후, 신분 때문에 그저 사도세자를 낳은 여자로 만족해야 했던 생모 선희궁. 사도세자와 그들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도세자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권력욕, 권모술수, 배신과 절망 그리고 공포를 읽지 못하면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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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들어가며 1부. 사도세자의 어른들 첫번째 강의. 영조―불안과 분노의 제왕 두번째 강의. 인원왕후―대비, 최고의 여성 권력자 세번째 강의. 정성왕후―왕비, 빛나는 외로움 네번째 강의. 선희궁―후궁, 왕의 여자 2부. 생장과 교육 다섯번째 강의. 왕이 되기 위한 공부 여섯번째 강의. 국정실습 일곱번째 강의. 놀고 싶은 세자 여덟번째 강의. 예술가와 제왕 아홉번째 강의. 독서가 가장 즐겁다 열번째 강의. 세자 교육의 문제점 3부. 광증의 전개 열한번째 강의. 광증의 증거 열두번째 강의. 광증의 증상 열세번째 강의. 자살 시도 열네번째 강의.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열다섯번째 강의. 초라하고 화려한 온천행 열여섯번째 강의. 세자의 비행 열일곱번째 강의. 평양을 다녀오다 열여덟번째 강의. 광증의 심리학적 문제 4부. 죽음과 사후 열아홉번째 강의. 나경언의 고변 스무번째 강의. 뒤주에 갇히던 날 스물한번째 강의. 세자의 죄명 스물두번째 강의. 왜 하필 뒤주인가? 스물세번째 강의. 죽음으로 가는 길 스물네번째 강의. 아들 죽인 아버지의 심정 스물다섯번째 강의. 금등지서의 비밀 스물여섯번째 강의. 세자 죽음의 책임 스물일곱번째 강의. 처가의 책임 5부. 정조의 길 스물여덟번째 강의. 정조의 어린 시절 스물아홉번째 강의. 소년 정조 서른번째 강의. 작은 임금의 일탈 서른한번째 강의. 삼불필지와 등극 저해 서른두번째 강의. 관련기록 세초 서른세번째 강의. 집권 초의 정조 서른네번째 강의. 정조의 통치 철학 서른다섯번째 강의. 정조의 죽음과 『한중록』 서른여섯번째 강의. 혜경궁, 철의 여인 나오며 보충수업 숙빈 최씨의 출신 논란|연잉군 초상―불안과 우수의 표상|궁중 요리의 진수|사도세자의 친필시|사도세자의 초상|뒤주 소동 부록 Ⅰ. 선행 저술 비판 첫번째 강의. 사도세자 당쟁희생설 비판 두번째 강의. 길 잃은 역사대중화―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 세번째 강의. 이덕일의 반박에 대한 비판 Ⅱ. 궁궐 안내 첫번째 강의. 조선 궁궐 돌아보기―사도세자 유적 답사 두번째 강의. 임금 침실의 풍경―「대조전 수리시 기사」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밝히다! 조선의 르네상스, 그 뒤에 감춰진 광기의 그림자 2011년 1월,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서 ‘우리 시대의 명강의’라는 기치 아래 인문학 강의로는 최초로 정민 한양대 교수, 정병설 서울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인터넷 연재가 시작되었다. 일방향적 정보 전달 방식과 제한된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 방식을 벗어나 매주 업데이트되는 연재글을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소통이 이루어졌고, 독자들과 함께하는 지적 탐험이 계속되었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중 매주 수요일 연재된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 죽음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꼼꼼히 읽어나가 많은 독자가 ‘역사 인식의 틀’을 넓힐 수 있게끔 이끌었다. 총 48회로 진행된 ‘권력과 인간’은 2011년 12월, 그동안 인문학 강의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갈증을 채워주며 조회수 4만 2천여 회, 댓글 수 5천 개 이상의 기록을 남기며 성공리에 끝났다. 또한 연재 중반인 2011년 6월, 정병설 교수는 총 6회에 걸쳐 ‘EBS 평생대학-역사이야기’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진행해 일반 대중에게도 사도세자 죽음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연재글을 기본 토대로 하여, 새로운 자료의 반영, 연재 과정에서 발견된 몇 가지 오류의 수정, 깊이 있는 독서를 돕는 보충수업의 집필 등 후속 작업을 통해 연재보다 좀더 단단해진 글로 출간된 『권력과 인간』은 독자를 18세기 궁궐 안으로 초대한다. 역사적 진실은 사료로부터 나온다. 역사의 진실을 캐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료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진실 규명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료를 오독하지 않고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엇갈리는 주장을 펼치는 사료들의 진위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다. 그 눈으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공적이고 사적인 여러 기록에서 윤색되거나 왜곡되어 덧씌워진 것들을 걷어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역사관이나 이데올로기로 그 눈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역사 속 사건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으며 그렇게 규명된 진실 속에서 권력과 인간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을까? 2010년, 『한중록』(문학동네)을 통해 혜경궁 홍씨에게 씌워진 ‘악녀’라는 오명을 벗기고,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실에 한 발 다가서는 가이드가 되어준 정병설 교수는 『한중록』을 주석·번역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일차적인 해석도 잘못되고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논거를 토대로 학문적 가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몇 명이 계속 잘못을 증폭해가며 그릇된 학설을 정착시킬 수 있었을까? 왜 학계에서는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을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은 조선시대, 아니 한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렇기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산> <성균관 스캔들> <영원한 제국> 같은 드라마, 영화, 소설로 끊임없이 재해석·재생산되며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작 학문으로 심도 깊게 논의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미쳤다 하여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도세자가 약소 당파를 편들다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 정도의 논의가 있었으나 두 가지 설 모두 제대로 된 근거자료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단순한 견해에 그쳤다. 이렇게 제대로 된 학문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출간된 『권력과 인간』은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사이에서 우리가 그동안 오독해온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각도로 분석하고자 한 첫 성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들으면 반드시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사인이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을까? 왜 그것도 뒤주에 가두어 죽였을까?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장 자세히 해명한 자료는 혜경궁이 쓴 『한중록』이다.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부분은 순조 때 쓴 것이다. 임금의 할머니가 썼기에 다른 사람은 감히 쓸 수 없는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그래도 사도세자의 사인과 직접 연관된 세자의 죄에 대해서만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중록』을 오독했다. 혜경궁이 사도세자는 미쳐서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읽었다. 세자가 미쳤다고 하여 임금이 아들을 죽인 것으로 이해했다. 오해가 의혹을 불렀다. 미쳤다고 해서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의혹 끝에 새로운 사인이 제기되었다. 아주 모호하게 서술된, 정조가 쓴 사도세자의 행장을 주 자료로 삼아, 사도세자가 당쟁의 와중에 희생되었다는 그럴 듯한 가설이 만들어졌다. 사도세자가 집권층인 노론을 미워하고 소론 편을 들다가 노론 편인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친정이 노론인 혜경궁이 남편을 죽인 데 자기 집안이 앞장선 것을 변명하기 위해, 세자를 미치광이로 몰았다고도 했다. 미쳐 죽었다는 것보다 그럴 듯한 새 가설이 점차 통설이 되었다. 아무도 그 주장과 논거를 하나하나 따지지 않았다. _머리말에서(4~5쪽)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라. 정병설 교수는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미쳐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를 공격하려다가 반역죄에 걸렸다는 『한중록』의 설명을 따르지만, 『한중록』만이 진실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이재난고』 『현고기』 『대천록』 같은 각종 사찬 역사서, 개인 문집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폭넓은 관점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분석·고찰해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우선 사료의 검토를 통해 사도세자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열 살이 넘어서자 점차 학문을 게을리했고,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서 본성을 잃었다(疾發喪性). 처음에는 대단치 않아서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다. 1757년과 1758년 이후 병증이 더욱 심해져 병이 발작할 때에는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죽인 후에는 바로 후회하곤 했다”라고 기록했다. 이외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 지위에서 내리면서 쓴 「폐세자반교」에서 “비록 (사도세자가)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雖曰狂何不處分)”라고 하였고, 세자 본인도 장인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본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울화증이 있는데, 지금 더위까지 먹어 임금을 뵙고 나오니, 울화가 더욱 극하여 미친듯이 괴롭습니다”라고 자신의 병에 대해 밝혔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사도세자를 지켜본 혜경궁 또한 『한중록』을 통해 세자의 병증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렸고,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여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가학증도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내관이나 내인을 향한 폭력이 후궁이나 아내, 심지어는 생모 선희궁과 부왕 영조에게까지 칼끝이 향했다. 이런 상황을 더이상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순히 미친 것이라면 치료를 하거나 보호하여 감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단순히 세자가 미쳤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한 달 전,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올렸다. 영조는 세자를 얕보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결행할 수 있는 인물로 보지 않아 그를 당장 처분하지 않고 처소로 돌려보내 반성하게 내버려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더 큰일이 벌어졌다. 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하루이틀 전, 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차고 영조가 있는 경희궁 쪽으로 갔다. 선희궁에게 이 소식을 비롯해 그동안 세자의 비행에 대해 전해들은 영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역모죄를 이유로 세자를 처벌했다. 그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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