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업가에게 찾아온 느닷없는 전화 한 통에
피맺힌 과거의 한(恨)이 한 꺼풀씩 벗겨진다!
소설가 조정래를 오늘에 있게 한 사회 문제작『불놀이』
30년 가까이 묻어두었던 과거가 무심코 받은 전화 한 통에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냉정하고 메마른 목소리의 남자가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나를 찾아 잊으려고 몸부림치던 일들을 끄집어내려 한다면, 인간이 참아낼 수 있는 한계점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1982년 문예지에 발표한 네 편의 중편소설 「인간 연습」「인간의 문」「인간의 계단」「인간의 탑」을 이듬해 연작 장편소설로 묶은 『불놀이』는 1999년 <조정래 문학전집>(전9권)의 두 번째 책으로 재출간된 바 있고, 1997년에는 미국 코넬대학 출판부에서 영어판이, 1999년에는 프랑스 아르마땅 출판사에서 프랑스어판이, 2005년 독일 페페르코른 출판사에서 독일어판이 출간되며 세계인에 소개되었다(현재 중국어와 스웨덴어로 번역 중). 해방 이후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명했던 벌교를 중심으로 이념 이전에 감정의 혼란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한(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작품은『대장경』(1972년)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문학평론가 황국명(현 인제대 교수)은 “역사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통찰이 돋보이”며 “격렬한 사회 변동에 가족사를 정교하게 접목시키고, 역사적 삶에 최대로 밀착하면서 또한 개체의 운명을 섬세한 촉수로 감지해낸다”고 평한 바 있다.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 마을의 세습된 지주 집안과 그 밑에서 농노처럼 억눌려 살아온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학살과 복수의 한 맺힌 악순환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사건이 있은 지 29년 동안 가족도 모르게 숨겨온 과거가 한순간 드러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50대 남자의 불안으로 시작된다. 지주 집안의 장정 38명을 찔러 죽이고 남의 아내마저 겁탈해 인면수심의 존재처럼 보이는 주인공은,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숨어 살아야 했던 집안의 자손이면서 자기 아내가 몰매 맞아 죽을 때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정신적 불구가 된 아들 역시 품어낼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다.
이 작품에는 봉건 제도가 무너져버린 후에도 토지소유나 생산의 관계는 끈질기게 남아 있었음이 여실히 담겨 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식민지 수탈정책까지 그 위에 겹쳐져 땅을 갈면서도 그 위에 삶은 세울 수 없었던 핍박받던 사람들의 한(恨)이 그려져 있다. 백성들은 농토를 소유하지 못했기에 궁핍했고 그와 동시에 가진 자들에 의해 천하게 대해졌으며, 결국 억울함은 커져만 갔던 것이다.
당시 일간지 기자였던 김훈(현 소설가)은 『불놀이』에 대해 “소설은 살육과 광기의 바탕이 된 한(恨)의 내용과 빛깔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면서 그 한풀이가 상대방의 한맺힘을 의미한다면 그 한풀이에 의하여 역사는 진보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신분으로도 재물로도 억눌린 자들의 생애에서 얽히고설키는 한(恨)을 냉엄한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그렸기에 “한(恨)이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무장되었을 때 얼마나 어둡고 짐승스러운 광기와 살육을 저지르게 되는가를 그려내면서 설움을 앞세운 폭력과 살육에 의해서는 인간도 역사도 결국 구원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김훈은 말했다.
추리적 사건전개에서 시작해 민중의 설움과 분노를 다이내믹하게 펼쳐내고 있는 장편소설 『불놀이』는 평화와 생산의 도구인 농기구를 만들던 손이 학살과 파괴의 도구인 창을 만들기까지 핍박받아온 삶을 우회적으로 그리고 있기에 현재의 독자들에게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6.25전쟁 전후의 사건들이 민족의 무의식에 남긴 상흔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염원이자 비원인 조국 통일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억압과 분노를 풀어내는 것은 통합과 화해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