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이르는 냉철한 묘사, 촌철살인의 감각!
건조하고 이성적인 화법과 묘사를 통해 풍경과 현상을 파헤치는 시세계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던 김기택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껌』이 출간되었다. 네번째 시집 『소』(2005)를 출간한 지 4년 만이다. 미당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그의 시집들은 독자와 문단에 화제가 되어왔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네번째 시집을 펴낸 직후 오랜 직장생활을 접고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서서 써낸 시들을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상과 사물에 대한 시선은 깊고도 한층 더 세밀해졌고 시인 특유의 묘사와 비유는 끔찍할 만큼 냉철해졌다. 이를 통해 그의 시세계가 그 영역이 확장되고 시적 사유는 아주 깊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이빨이 먼저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 ―「껌」부분
표제작 「껌」은 이번 시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기택의 시적 화자는 인간의 입장과 주관을 배격한다. 때문에 흔히 시 안에서 저질러지는, 시적 자아의 섣부른 감정이입이 불러오는 주체의 폭력 또한 철저하게 배제된다. 그 대신 시인은 온전히 사물과 대상의 입장에 서서 진술한다. 다시 말해 대상의 본질과 동떨어진 안일한 비유나 주관적 묘사는 애초부터 김기택 시와 거리가 먼 것이다. 김기택은 풍경과 대상의 편에 서 있는 시인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이 “이빨이 지쳐/마지못해 놓아준 껌”이 되는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전환에 이르게 하는 세밀한 묘사는 그간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인식을 완벽하게 깨부순다. 즉 입안을 청결하게 만드는 도구로서의 껌은 인간이 내재하고 있으나 짐짓 무시해왔던 “살육의 기억”과 “피와 살과 비린내”를 강하게 환기키고 종내에는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일깨우고 파헤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전략은 시집 곳곳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등장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 안에서는 삼겹살이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삼겹살」)거나 수십 마리의 통닭이 “이미 죽은 죽음을 끓여서 한번 더 죽이려는 손님에게/절하고 있”(「절하다」)다. 생선 또한 “이글이글 익는 눈으로/ 눈을 태우는 불을 보고 있”(「생선구이」)고 “산과 들을 헤메며 뛰어다니”던 것들은 비린내로 저녁상에 내려 앉는다(「저녁상에에서 비린내가 난다」). 이러한 시적 인식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일상에 내재된 폭력과 상처의 본질이다. 무수한 폭력과 파괴의 기반 위에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나아가 지구 역시 온통 이러한 살육의 기억이 현재진행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역설하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소의 뿔 역시 “두려움, 분노, 증오, 슬픔 따위가 오랜 세월 동안 원뿔형으로 자란 것”(「소싸움」)이라는 비유가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상이 환기하는 폭력은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에까지 이르게 한다.
한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엔 눈과 팔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방향도 없이 앞으로만 기어가다 저희들끼리 마구 엉켰다. (…) //씹을 때마다 용수철처럼 경쾌하게 이빨을 튕겨내는 탄력.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탄력. 한번에 다 죽지 않고 여러번 촘촘하게 나누어진 죽음의 푹신푹신한 탄력. 다 짓이겨지고 나도 꿈틀거림의 울림이 여전히 턱관절에 남아 있는 탄력. 목 없고 눈 없고 손 없는 죽음이 터무니없이 억울할수록 이빨은 더욱 쫄깃쫄깃한 탄력을 받고 있었다. - 「산낙지 먹기」 부분
시인은 이처럼 일상의 모든 대상을 통해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대상의 죽음을 ‘탄력’으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인의 탁월함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사소한 죽음에서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라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인간은 어쩌면 대상을 죽일 때마다 ‘죽어 있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을 시인은 일깨우는 것이다. ‘살아 있는 죽음’으로서의 대상은 끈질기게 죽지 않고 일상에, 우리의 몸속에 편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계탕 속 닭은 ‘어린 영혼’으로 변하여 “뱀 아가리 속같이 길고 컴컴한 당신의 목구멍”(「삼계탕」) 속으로 들어간 뒤 ‘닭살’처럼 돋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과 폭력에 대한 사유의 연장선에서 이번 시집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것은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속도’에 대한 사유이다. 유독 길과 차가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점은 그래서 더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김기택에게 길은 낭만적인 소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교통사고와 로드킬(Road kill)의 현장이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렸던 것이다./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속도를 더 내었다. ―「고양이 죽이기」 부분
속도와 식욕의 상징인 타이어는 그야말로 현대문명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식욕과 속도에 대한 사유는 길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또한 뒤집어엎는다. 새로운 출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길이 속도 자체로 비유되는 것이다. 길은 거침없이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나”오기 때문에 “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은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속도로」). 자동차 또한 로드킬의 주범으로서 살육의 수단인 총알(「교통사고」)로 비유된다. 이 속도전은 멀쩡한 사람도 정신병자로 만들고 속도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며, 인간으로 하여금 “속도에다 온몸의 복수심을 다 집중시켜 정신없이 채찍질하다가/죽거나 죽”(「죽거나 죽이거나 엉덩이에 뿔나거나」)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밖에 많은 시들(「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오토바이와 개」 「즐거운 버스」 「버스」 등)에서 이러한 속도에 대한 명상은 다각적으로 발휘되는데, 문학평론가 최현식 역시 이 점에 주목한다.
‘속도-탄성’이 탐욕하는 비명횡사의 현장과 끔찍한 죽음의 전시와 폭로에 그쳤다면, 김기택은 당위론에 결박된 문명비판론자로 지칭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사학보다는 ‘온몸’의 변신에 집중함으로써 속도를 위시한 문명의 동업자이자 공모자로 변복(變服)중인 자신과 우리들의 파탄을 널리 공표한다. 이 대담하고 세심한 자기탄핵이야말로 김기택을 시대와 불화하는 촌철살인의 감각인으로 이끌고 변화시켜온 요체에 해당된다. ― 최현식 해설 「침착한 명랑, 즐거운 우울」
이렇게 시인이 살육의 대상과 풍경에 천착하거나 속도에 집착함으로써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명비판과 자기반성을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