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기린아, 박지리를 주목하라
2010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합체』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등단한 박지리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체 게바라를 절묘하게 배치해 발랄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무협소설을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당시 심사를 맡은 소설가 오정희, 박상률, 김중혁, 김종광은 “이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심사평을 대신하였다. 2012년, 첫 작품과 너무나 대조적인『맨홀』이라는 어둡고 처연한 이야기로 돌아온 작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다양한 메타포로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박지리는) 문학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 환상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이며, 삶의 구석구석에 놓인 맨홀은 그렇게 만만치 않”(강유정/ 문화평론가)음을 환기시켰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일반소설인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여전히 젊은 스물아홉 살의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해방 전후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를 고농축, 고밀도로 집적해 유머와 풍자로 버무린 새로운 ‘풍속소설’이다. 감히 21세기 판 『고리오 영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작품은 시종일관 안녕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풍자와 조롱으로 통렬하게 파헤치면서 리얼리즘 소설의 새로운 계보를 잇는다.
양춘단이 대학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2009년부터 4년에 걸친 시간을 한 축으로 한 이 작품은 또 다른 축으로는 양춘단을 중심으로 남편 김영일,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부모 양호익, 정순규와 차남 김종찬과 며느리 문유정 3대에 걸친 가족사, 더 나아가서는 춘단의 손주, 손녀 이야기까지로 이어진다. 양춘단이 대학에서 관계 맺는 사람들과 대학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비루하고 치졸하게, 때로는 세상과 한판 붙으면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무명씨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은 우리 사회의 정교한 축소판이다.
양춘단, 대학 가다
2011년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은 그동안 대학 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던 노동자들의 존재를 공론화한 사건이었다. 청소노동자는 청소 일을 직업으로 하는 노동자로, 우리에게는 환경미화원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최근 들어서 언론의 집중을 받은 이 사태는 실은 훨씬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소노동자들의 기본권 찾기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들의 처우는 쉽사리 개선되지 않고 있고, 눈 돌릴 일이 너무 많은 대한민국에서는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도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편이다.
여기 대학에서 일하는 또 한 명의 청소노동자, 환경 미화원이 있다. 양춘단,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은 주민등록상 나이로는 63세, 실제 나이는 65세다.
작가는 양춘단이 송정리 시골마을에서 얼마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지, 그런 그가 왜 서울 아들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 춘단이 어떻게 해서 대학 환경 미화원으로 취직하는지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집안 사정상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늘 배움에 목말랐던 춘단은 ‘대학’이라는 말 한마디에 기꺼이 청소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빽으로 들어와 처음부터 ‘로얄층’을 맡으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배척을 당한다.
춘단이 휴게실에 들어왔는데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네다섯씩 모여 도시락을 먹던 무리 중에는 콧방귀를 뀌며 아예 등을 지고 앉아버리는 여자도 있었다. 최 여사가 눈치를 주며 그러지 말라고 해도 미화원들은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이번에 5층에 가기로 되어 있던 남씨는 숨기지 않고 아예 들으란 듯이 말했다. 내 참, 더러워서. 이젠 청소도 빽으로 들어오는 세상이네.
춘단은 난생처음 당해보는 냉대에 어쩔 줄 몰라 문 앞에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100쪽)
환경미화원들의 휴게실인 네 평 남짓한 컨테이너는 몇 년 전 이 대학 환경미화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언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급조된 가건물로 이와 관련해 학내에서 오고간 토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블랙코미디와 마찬가지다.
컨테이너 박스에 모여든 성씨로만 불리는 사람들은 다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자들로, 지하주차장 한켠에 마련된 어둡고 좁고 축축한 컨테이너에서 잠시 쉬거나 급하게 먼지 밥을 먹으며 생활고를 달랜다. 이들과는 사정이 좀 다른 양춘단은 청소를 끝내놓으면 강의실을 기웃거리며 도둑 강의를 듣기도 하고, 캠퍼스를 오가는 대학생들을 구경하며 대학에 들어온 기쁨을 만끽한다. 어두운 컨테이너가 싫어 자신이 일하는 A관 건물 옥상에서 도시락을 먹는 양춘단은 거기에서 시간강사 한도진을 만나고, 둘은 곧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사실은, 내가 그짝 교수 선생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오. 맨날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점심시간만 되면 꼭 여기서 마주치데요. 그때마다 밥은 먹었어요, 그라고 말을 걸어볼라 해도 괜시리 어려워서 못 했는디, 대학에 안 다닐 때는 몰랐는디 막상 대학에 와보니께 대학 다니는 사람한테 말 걸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디다.” (107쪽)
낮은 자의 시선으로 본 우리 대학의 풍속도를 통해 사회의 안녕을 묻다
거대한 호수와 코끼리 석상은 이 대학의 명물로 꼽히는데, 그런 명성 뒤에는 오랜 세월 소문으로 다져진 웃지 못할 사연들이 숨어 있다. 호수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궤를 같이하며 매몰 위기에 놓였다가 멋진 조경을 가진 생태호수로 재탄생했고, 제작비보다 운반비가 더 들었을 것이라는 코끼리는 태국 소쿰타빗(실제로는 없는 지명)에 봉사를 나간 대학생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국왕이 친히 보낸 선물이라는 소문이 돌지만 사실은 또 그렇지 않다.
대학의 비리를 폭로한 대자보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뒤에서 밝혀지는 대자보의 실체 역시 작가 특유의 풍자와 조롱으로 유머러스하게 읽히지만 동시에 씁쓸함을 안겨준다. 최근에 ‘안녕들하십니까’로 다시 대자보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지만, 스펙 쌓기와 취업을 인생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사실 너무나 생소한 것이기도 하다.
대자보가 출몰했다. 모두가 무심코 전한 그 말 속에는 마치 기억과 기록에만 존재한, 실제로는 본 적 없는 괴이한 생물체가 늪지대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물갈퀴 달린 끈적끈적한 발을 뭍으로 드러냈다는 어감이 숨어 있었다. (…) 대자보는 사라졌지만 그 큰 발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학교 곳곳에 깊게 파였다. 몇 년 만에 나타난 대자보인가. 학교를 오래 다닌다는 이유로 아버님이라고 불리는 03학번조차 대자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자보가 뭔데요,라고 묻는 09학번도 있었다. 질문을 받은 07학번은 핀잔을 줄 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넌 보고도 모르냐. 아까 니가 본 게 대자보잖아. 09학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157~158쪽)
교수와 대학원생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한 대자보가 붙자 대학은 발빠르게 홈페이지를 폐쇄하고 학생들은 구시대의 게시판인 화장실에 온갖 비방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미화원들의 몫으로, 소장이 갖다 붙인 ‘화지특’(화장실 낙서 지우기 특공 미화조)으로 활동하며 정규업무 외에 두 시간을 더 일하게 되지만 추가업무 수당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화지특 활동과 1학기 종강으로 잠잠해진 대학은 2학기 개강과 함께 이번에는 환경미화원들의 시위로 소동을 빚는다. 새로 온 소장과 함께 시급이 깎일 운명에 놓인 미화원들은 난생 처음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정성껏 쓰지만 정작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대학’에게 보내자는 결론을 내린 이들이 생각하는 대학의 실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대학이 누군데?
결국은 제일 위에 있는 총장이 대학의 주인 아닌가. 아니, 내가 듣기로는 총장을 임명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던데. 대학이란 건 여기 부지랑 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