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리스(Endless) 시리즈는 도서출판 넥서스가 ‘문학의 영원함’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세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한국문학 작품을 엄선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2024년 새롭게 시작한 재출간 프로젝트입니다.
Endless 03
≪겨우 존재하는 인간≫
1997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오랫동안 절판되어 희귀도서로 고가에 판매되었던 이 도서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징후를 포착하여 쓴 도발적인 작품으로 형이상학적 삶의 불안과 실존의 문제에 천착한 알베르 카뮈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연상케 한다.
소설가 정영문의 데뷔작이자 첫 소설이기도 한 이 장편소설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적인 삶의 궤도를 의심하고 해부한 작품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분노 범죄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이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예언적 통찰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일상의 탈출 욕구가 한순간에 파괴 충동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독자는 삶의 맹목성에 저항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본질을 꿰뚫고 나아가려는 집요한 시선과 끈질긴 문체가 독창적인 소설의 압도적 경지를 보여준다.
나는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나의 움직임 속에서도 살아있지 않다.
유리창에 비친 나는 이미 죽은 나이다.
나는 부재 속에서 존재하고, 그 부재는 나의 삶의 환경이다.
● 집요한 관찰자의 시선에서 가차 없는 집행자로 변신
이 소설은 삶에 내던져진 불가피한 운명 속에서 하루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권태로운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교사였던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후 부모가 주는 생활비를 받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거리의 노숙자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거나 길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하며 지나는 사람들과 지렁이 같은 미물을 관찰한다. 그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자기를 평가절하한다. 삶 자체가 쓰레기 더미와 같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타인의 삶도 무가치해 보일 뿐이다.
그는 아내를 죽였다고 고백하는 남자를 목 졸라 죽인다. 특별한 동기도 이유도 없는 살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렁이를 보면서 그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낀다. 작가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세기말의 일탈 욕망과 문명의 병리적 징후를 포착해 내고 있다.
●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인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던가. 잘 모르겠다.”라고 하며 다음 날 여인과 관계하는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단순히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신다는 이유로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을 총살한 뫼르소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영문의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은 어머니를 보며 살해 충동을 느낀다. 열한 살 때의 소년 시절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층 방에 있는 어머니를 강아지처럼 내던져 버리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끔찍한 욕망에 사로잡혀 분열하던 정신은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고 망각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고 지나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트린 어머니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결국 어머니라는 가장 익숙한 존재는 ‘내가 처음 보는 여자’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특별한 이야깃거리나 극적인 전개, 인물 간의 갈등은 없으나 묘하게 읽는 이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전율을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