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빛

Susie Linfield · 인문학
4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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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에 뼈만 앙상한 난민들, 전쟁통에 팔다리가 잘린 아이들, 폭탄테러로 산산조각 난 그을린 주검들…… 사진은 세계가 발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빛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 불편한 진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기에 외면당하고, 희생자를 모독하고, 감상자의 관음증을 부추기고, 자극에 지쳐 점점 참상에 둔감하게 만드는 ‘재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고 매도당한다. 사진의 진실과 객관성을 불신하는 포스트모던 비평은 메시지 대신 메신저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정치폭력과 고통을 찍은 사진이 착취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비난은 정당한가? 이런 사진을 보는 올바른 태도란 무엇인가? 사진 속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사진은 세상을 더 살 만하게 바꿀 수 있는가? 사진은 어둠을 비출 수 있는가? 책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사진에 대한 회의를 피력한 발터 벤야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수전 손택의 주장을 살펴보고, 홀로코스트와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시에라리온의 집단학살과 아부 그라이브의 포로 학대까지 정치폭력을 증언하는 사진들을 검토하고, 로버트 카파와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라는 우리 시대 대표적 포토저널 리스트들의 작품들을 분석한다.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비참 앞에 ‘외면해!’라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저자는 그럼에도 보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고통스런 사진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사진이 전하는 무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희생자가 처한 프레임 밖의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혁명의 낙관주의가 사라지고 냉전 이후 인간의 잔인성이 폭발한 이 허무주의 시대에도, 저자는 카메라가 이끌어내는 ‘공감의 도약’을 믿으며, 사진이 ‘연대’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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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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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

“폭력적 세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제임스 에이지가 ‘존재의 무정한 빛’이라고 부른 것을 바라보고, 탐구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디언》 “포토 저널리즘의 힘에 대한 포스트모던 비평의 혼란을 영리하고 알기 쉽게 해체한다.” 《LA 타임스》 사진비평 분야의 오랜 지적 침체 끝에 나온 이 책은 자극적이고 생기 넘치는 논의를 제공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끼친 결정적 영향을 강조하며 훌륭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하아레츠Haaretz》 “걸작. 수지 린필드는 사진을 보는 좋은 눈과 정치를 보는 좋은 머리를 지녔다.” 마이클 왈져 Michael Walzer(정치철학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 콩고, 르완다,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냉전 이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소식을 우리는 대개 전쟁 사진 작가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접한다. 그 사진들을 보며 우리는 충격과 연민,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사진을 지적으로 바라보는 사진 비평가들에게 이러한 사진, 정치폭력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불편함을 넘어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다. 이유인즉 이런 사진은 폭력과 고통을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전시하여 희생자를 구경거리로 삼는(따라서 모독하는) 자본의 시선이며, 감상자가 피투성이 스펙터클에 과다 노출되다 보면 정작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동정피로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며 포토저널리즘의 가치와 가능성을 옹호하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사진에 대한 의심은 탄생의 순간부터 있었다. 근대의 발명품으로서 예술과 기술, 창조와 모방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사진은 모더니티에 대한 모든 의혹을 대표했다. 대중은 누구나 손쉽게 찍고 복제할 수 있는 이 새로운 민주적 매체에 열광했지만,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대체로 적의를 표명했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을 현실로부터 아우라를 빨아내는 세속화의 첨병으로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극도의 비참을 흥밋거리로, 인류의 고통을 소비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사진의 미화 능력을 신비화의 한 형식으로 규정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한발 더 나아가 사진은 본래 반관조적이며, 이미지의 범람은 결국 개인을 위축시키고 무관심과 무지를 조장해 현실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고 여겼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사진은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부르주아의 손에 들어가 진실에 맞서는 끔찍한 무기”가 되었으며, 군수공장을 찍은 사진이 그 산업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듯, 단순한 재현은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더 최근 비평가들의 견해도 부정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단조롭고 진부하고 어리석고 무교양적인 ‘재난’으로 묘사했고, 존 버거는 전쟁사진들이 보는 이에게 도덕적 무력감만을 안기고 정작 그 원인인 전쟁은 탈정치화한다고 비난했다. 오늘날 주류 사진비평의 냉소적 논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전 손택에 따르면, 사진은 기만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관음증적이고 착취적이다. 정치폭력을 기록하는 카메라는 희생자를 “추정하고, 침범하고, 침입하고, 왜곡하고, 약탈하고…… 암살한다.” 1970년대부터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은 모더니즘 예술의 해체라는 원대한 기획 아래 사진의 진정성, 독창성, 자율성을 공격하며 선배 비평가들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들에 따르면, 사진은 겉으로는 계급과 문화를 뛰어넘는 객관적 진실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의 충직한 노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가장 제국주의적인 매체에 불과하다. 사진은 감상자에게는 공포영화와 같다. 공포의 외양을 띠지만 그 위협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반면 희생자에게 사진은 이중의 정복행위를 저지른다. 피사체는 “먼저 억압적인 사회적 힘에, 그 다음으로 ‘이미지의 지배’에 희생된다.” 요컨대, 사진은 자기도취와 관음증 사이의 추잡한 비즈니스이고, 그것을 보는 행위 역시 범죄나 마찬가지다. 사진을 혐오해 온 사진비평가들의 지적 담론 포토저널리스트를 향한 우리 시대 만연한 ‘지적 담론’을 살펴보자. 여기엔 우리 모두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무력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사진의 진실’을 여전히 믿는 ‘낡은’ 포토저널리스트들을 비웃는 풍토가 있다. 저자는 사진을 혐오하는 현대 비평가들을, 무함마드를 풍자한 덴마크 만화가를 처형하라고 외치던 성난 무슬림 군중과 겹쳐놓으며 동일한 후진성을 개탄한다. 그 시위자들도 해당 이미지를 착취, 모독, 제국주의의 ‘정복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미지를 증오하고 검열하는 데서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가 서로 합류하는 셈이다. 저자는 사진에 대한 이 모든 비판의 핵심에 ‘감상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즉시 우리는 본능적 감정에 휩싸인다.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충격, 공포, 연민, 분노의 강렬함은 다른 어떤 예술도 따라오지 못한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에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강력한 힘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사진이 환기하는 감정은 통제와 예상을 벗어나기 일쑤다. “굶주린 사람의 사진을 보고 혐오를 느낄 수도 있고,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낄 수도 있으며, 대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에 따분함을 느끼거나 반대로 지나친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사진비평가들은 사진이 불러오는 우리 안의 억압된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일까 봐 두려워한다. 뿐만 아니라 사진은 세계의 작동방식, 사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모호하게 전달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모든 폭격 사진, 모든 학살 사진은 구체적 맥락을 모르고 보면 다 엇비슷해 보인다). 감정은 넘치는데 설명은 부족하다. 바르트가 사진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것은 사진의 이러한 반설명적이고 반분석적인 성격이었다. 일찍이 사진에 불만을 피력한 세 독일인, 특히 브레히트에게 이러한 감정적 접근은 가장 나쁜 접근방식이었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언론의 황금기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온갖 자극적인 사진들로 도배되었다. 사민주의자, 공산주의자, 나치가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조작된 사진들이 정치적 선전선동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혼돈과 파멸로 치닿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브레히트는 성찰되지 않은 감정은 ‘인민의 아편’이며, 예술은 반드시 감정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지만 악용하고 오독할 위험성도 큰 사진에 대해서 벤야민이 우려를, 크라카우어가 경멸을, 브레히트가 분노를 표한 것은 일면 타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이마르 시대가 아니며,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이들의 주장을 금과옥조인 양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사진 속 ‘이름 모를 희생자’와 연대한다는 것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이 칭찬하는 사진이란 세계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사진들뿐이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할 방법이 없기에 밖으로 나가 세계를 보기를 포기한 꼴이다. 이들은 ‘사진의 진실’이라는 개념을 ‘부르주아의 끈질긴 설화’라고 조롱하면서, 사진은 현실을 참되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줄 현실 자체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전통적 포토저널리스트가 사진의 객관성을 믿는다면, 포스트모던 비평가는 사진의 주관성에 집착한다. 이들은 벤야민의 말을 복음처럼 받들면서도 정작 벤야민의 변증법적 상상력은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모든 예술처럼 사진도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고, 발견되는 동시에 만들어지며, 죽은 동시에 살아있고,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그 즉각적인 이미지와 그것을 보고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과 느낌, 숨은 의미, 사진을 둘러싼 지식과 정보 사이의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 안에도 없고 프레임 밖에도 없다.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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