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공간성’에 갇힌 ‘공간’을 해방시켜라!
철학과 건축의 만남,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다!!
프랑스 왕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부터 21세기 부와 호화로움의 표상이 된 두바이의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까지, 건축이 구성해 낸 공간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복무하는 하나의 ‘대상’ 혹은 ‘고정된 실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이들의 보호구역 역할을 했던 뒷골목의 게토들이 이성애자들에게 성적 자극을 제공하는 매혹의 공간이 되고 전 세계 금융자본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가 항의와 점거의 아이콘이 된 것처럼, 건축 혹은 공간은 항상 처음의 목적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운동해 간다.
『건축, 그 바깥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잠재성’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책이다. 몸에 관한 페미니즘의 입장 중에서도 ‘성차’(性差)에 주목하여 육체 페미니즘(Corporeal Feminism)이라는 이론적 영역을 개척한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이 책에서 (철학에서의 ‘몸’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건축에서의 ‘공간’ 개념을 다각도로 탐구함으로써 공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스스로 “건축 분야에는 문외한”이라고 말하는 이 철학자는 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뤼스 이리가레 등의 철학적 개념들을 빌려와 공간의 잠재성을 자유롭게 탐사한다. 이는 건축이라는 고정된 실체에 철학이라는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고자 하는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기획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건축에 대한 글 모음인 만큼 바깥을 사유하는 것에 대한 글 모음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로스는 시간, 변화, 발생과 같이 전통적으로 공간과는 다른 축에 위치한다고 여겨지던 철학적 관념들을 건축에 결합함으로써 공간 자체가 지닌 생명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가능성’(possibility)과는 구별되는 ‘잠재성’(virtuality)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되기’(becoming)를 할 수 있는 존재,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호흡을 바꿀 수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철학과 건축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각각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탈경계 인문학’의 완벽한 표본이다. 이는 ‘사이 시리즈’(그린비출판사, 2012년 3월 1차분 3권 발간) 등을 통해 탈경계 인문학의 길을 모색해 온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공간팀’이 이 책을 번역한 이유, 그리고 독자들이 이 책에 주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건축, 그 경계의 ‘바깥’에서 발견한 특별한 시선!
기술과학인 건축과 인문학인 철학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분야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구한 전통을 가진 학문으로서의 건축 역시 스스로의 철학적 관점을 끊임없이 계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건축가들 혹은 도시계획가들은 어김없이 위대한 사상가였고,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물 혹은 도시를 구축해 냈다. 그렇지만 그러한 ‘건축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건축의 ‘내부’에서만 합리성을 갖고 통용되는, ‘내재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반면 이 책 『건축, 그 바깥에서』는 건축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건축이라는 학문의 ‘바깥’에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독특한 차별점을 갖는다. 단순한 물리적 외부가 아닌 “안쪽의 자기 일관성에 속박되거나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우리가 완전히 혹은 완벽하게 차지할 수 없는 장소”(15쪽)로서의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공간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이다.
건축의 ‘외부자’로서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시간성과 젠더라는, 건축의 바깥에 있는 개념(이자 철학의 안쪽에 있는 개념)이 건축과 공간에 생산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읽어 내며 베르그송, 들뢰즈, 이리가레 등의 철학자들이 공간을 사유한 방식에 대해 분석한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을 이끌며 주요하게 사용했던 잠재성과 시간성은 그로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가능성’이 현실의 범위 안에서 예측 가능한 기대를 표시하는 용어인 데 반해, ‘잠재성’은 내재되어 있되 발현의 양상과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완벽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그로스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도입하여, 단순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현되지 않은 과거의 잠재성에 온전히 열려 있는 건축/공간에 주목한다. 한편 들뢰즈는 건축과 건축 내부에 유동성이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로스는 들뢰즈의 생각이 단순히 건축의 고정된 목적을 재고하기 위해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구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물음을 던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건축은 고정되는 독립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가레가 주장한 ‘차이’의 문제도 건축의 성차를 설명하는 데 영감을 제공한다. 이리가레는 그동안 여성이 일종의 용기 혹은 덮개로서, 자신의 공간을 갖지 못하고 남성의 정체성을 담는 공간으로서만 기능해 왔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여성성이 공간화되어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로스는 건축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비판하며, 건축을 일종의 ‘그릇’으로 여기는 인식에 반기를 든다. 건축은 도시계획자나 건축가의 필요와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조직되는 단계까지만 수동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 이후의 건축은 “다양한 신체들이 살아가는 터이자 실천에 의해 뒤틀리고 변형되는 살아있는 실체”여야만 하며, 무엇인가로부터 부여되는 가능성을 뛰어넘어 잠재성에 기초하여 평가 혹은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래하지 않은 공간, 그러나 곧 도래할 공간
『건축, 그 바깥에서』는 물리적으로 우리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건축물만을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이 닿는 곳, 현실에는 없지만 있고자 하는 곳까지 공간으로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이버공간이다. ‘가상’의 공간이면서도 현대인의 삶에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사이버공간은 (역설적이게도) 현실 세계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을 육체성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운 공상의 실현이 가능한 공간, 욕망이 통제되는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들은 성별과 외모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만든 아바타를 자아와 동일시하여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편,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웹상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에 투영시키기도 한다. 물론 사이버공간이 물질과 육체,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를 변형시킨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컴퓨터 기술 애호가들은 사이버공간이 궁극적으로 건축에 있어 비(非)물질적인 관념을 실현하고 감각과 물질을 강화하거나 증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시뮬레이션의 장이자 정보 교환의 네트워크가 되는 사이버공간은 예정된 결과를 학습해 온 관습적인 건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막연히 공간 혹은 장소로 생각해 왔지만, 실질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유토피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유토피아는 환상적인 ‘곳’,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이 실현되는 ‘곳’, 즉 그러한 ‘공간’ 혹은 ‘장소’로 이해된다. 그러나 『건축, 그 바깥에서』는 유토피아가 공간이나 장소만으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없는,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토머스 모어 등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논의들을 검토한 후, 그로스는 “이상적이라는 것은 전혀 위상학적으로 고려될 수 없는 문제이며, 유토피아는 공간성의 논리를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대신에 그녀는 유토피아를 ‘잠재성을 가진 현재’, ‘미래를 가지지 않은 미래’로 평가한다. 즉 유토피아란 현재의 이상이 포함된, 맞이하고자 하는 미래라고 이야기하며, 공간적 차원이 아닌 시간적 차원으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도래할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며 그로스는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