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엽기, 광기, 해학―일본 문화의 원형 분석
1990년대 후반, 획일화된 대중문화에 식상함을 느낀 문화 소비자들은 개성을 추구하면서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엽기, 광기, 해학으로 대표되는 그로테스크한 사회 심리가 등장했다. 사람들은〈링〉의 귀신 사다코,〈전차남〉의 오타쿠 주인공,〈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잡신들,〈음양사〉의 주술사 아베노 세이메이,《겐지 이야기》의 추녀 스에쓰무하나 등 일본 문화의 대표적인 등장인물들에게서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엽기, 광기, 익살, 풍자 등을 발견했다.
1998년 우리나라가 일본 대중문화에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일본 문화는 가요, 만화, 애니메이션, 성인 잡지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도 일본 문화는 케이블 채널의 일본 드라마와 서점 소설 코너를 장악한 일본 소설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중이다. 마니아층을 넘어서 이제 한국 대중문화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 문화, 일류(日流)는 최근의 두드러진 현상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어온 흐름’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지 못했고 따라서 본격적인 분석이나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로테스크로 읽는 일본 문화》는 일본 문화에서 ‘그로테스크’라는 원형을 추출해 상대의 언령 신앙, 중고의 모노노케, 중세의 노能, 근세의 가부키歌舞伎와 교겐狂言, 현대의 애니메이션과 영화까지 일본 문화의 저변을 파고들며 일본 문화를 통시적으로 고찰한다. 장르와 학제를 넘나드는 10편의 글은 일본 문화의 시원과 변용을 담고 있어 일본 문화 전반을 꿰뚫어 보게 해준다.
이 책은 일본 문화 콘텐츠의 원형을 ‘그로테스크’로 정의하며, 일본 문화의 그로테스크성이 현대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의 원형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일본 대중문화가 우리 문화와 주고받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지금, 이 책은 일본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 만연한 그로테스크성을 성찰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일본적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용어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굴한 고대 로마 지하 동굴grotta의 장식 무늬에서 유래한다. 동굴 벽에 인간, 꽃, 과일 등의 형상이 괴상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 괴기함을 이탈리아어로 ‘그로테스키grotteschi’라고 했다. 이후 그로테스키는 미술, 문학 등 예술 일반에서 환상적인 괴기성과 우스꽝스러움을 일컫는 프랑스어 그로테스크로 정착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그로테스크라는 용어를 기괴하고 끔찍하거나 엽기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로테스크는 기존의 것에 대한 변형, 그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뿐만 아니라 괴기한 것, 부조리한 것, 아이러니, 왜곡, 패러디, 풍자, 비하의 형상을 통한 우스꽝스러운 형상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일본 문화에서 발견하는 그로테스크는 서양의 것과 차이가 있다. 벌거벗고 춤추는 신,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한 춘화, 끔찍한 지옥, 우스꽝스러운 주인공, 기묘한 이야기, 엿보기 등 정상의 규범을 깨뜨린 일본 문화의 변칙적인 미학은 잔인하고 엽기적이며 광기를 담고 있는 한편 조소와 해학을 담고 있다. 단순한 기괴함을 넘어선 일본 문화의 그로테스크는 자유로우면서도 노골적이고(性), 두려우면서도 애잔하고(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위엄이 있고(異), 부조리하면서도 아름답다(能). 일본적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확장하는 동시에 일본 문화의 다양성을 관통하고 있다.
3. 장르를 넘나드는 일본의 종교적.문화적 표상
이 책의 장점은 그로테스크적 요소를 발굴하는 데 있어 신화와 역사 그리고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명의 저자들은《고지키》,《겐지 모노가타리》,〈백귀야행도〉,〈아오이노우에〉,〈음양사〉,〈전차남〉,〈원령공주〉 등 신화에서 역사, 문학, 회화, 가면극, 영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그로테스크하게 나타나는 일본의 종교적?문화적 상징과 그 표현 양상을 찾아내고 이를 심도 있게 재해석한다. 그 예로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소개하면서 구사레가미를 잡신과 연결 짓고, 목욕 장면을 일본의 종교관으로 풀어내며, 그 기원을 역사의 일화로 설명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 “영화에는 치히로가 온몸이 오물로 뒤덮인 부패신 구사레가미クサレガミ를 정성껏 목욕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타인의 몸을 씻기는 행위가 자신의 공덕을 쌓는 덕행이 된다는 일본 전래의 종교관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목욕 보시의 기원은 일본 역사상, 불교의 후원과 융성에 힘쓴 고묘光明 황후 일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단히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절을 건립한 이후, 스스로의 공덕에 만족하고 있던 황후에게 어느 날 하늘에서 “아직 공덕이 부족하니 절에 목욕탕을 만들어 귀천을 불문하고 천 명을 목욕시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신탁을 열심히 실천하던 황후에게 999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심한 나병 환자였다. 그러나 황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환부의 고름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는 등, 지극 정성으로 대접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느새 부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황후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라졌다. 이후 목욕 보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고전 문예의 주된 테마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게 된다.”(9장 일본 요괴 문화의 계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