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07년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여, 칸 영화제 조직위원장이자 세계영화계의 ‘황제’ 질 자콥이 프랑스의 대표 작가 르 클레지오에게 의뢰하여 탄생한 영화 에세이이다. 질 자콥 자신이 서문을 쓴 이 책은 2007년 5월 칸 영화제 개막에 맞춰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출간되었으며, 르 클레지오는 그해 칸 영화제 단편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초대된 바 있다.
발라시네, 영화의 꿈속을 거닐기 혹은 영화를 노래하기
이 책의 제목인 ‘발라시네(Ballaciner)’는 ballader(산책하다, 노래하다)와 cin?ma(영화)를 합친 신조어로서,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불어 ‘ballade'가 지닌 이중의 의미, 즉 ‘산책’과 ‘발라드(사랑의 노래 또는 시)’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산책’은 영화에 대한 전문 비평가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영화를 좀더 주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관조해본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노래’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향해 열린 창’으로서 저자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영화라는 매체에 바치는 사랑의 노래(또는 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저자는 영화가 가진 꿈과 상상력의 속성도 강조한다. 영화는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꿈을 꾸게 하는 것임을 책 속에서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적인 서정으로 영화를 이야기하다
이 책은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의 어린 시절 무성영화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하여 2차 대전 이후 일본 영화의 전성기에 대한 회상,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필두로 한 유럽 영화의 격동기를 지나온 체험, 현재 이란 영화의 신선함 및 한국 영화의 약동에 대한 증언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의 주요한 장면들을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특히 영사기 불빛을 달빛에 비유한 것([한밤에 빛])이나 영화의 맨 마지막 ‘끝fin’이란 자막에 대한 단상([끝])은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언급하고 있는 영화나 분석도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오데트](칼 드레이어), [라탈랑트](장 비고), [우게츠 이야기](미조구치), [한여름 밤의 미소](잉마르 베리만), [아카토네](파솔리니) 등 영화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소위 ‘엘리트’적인 영화들을 비교적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영화를 비롯한 이란 영화, 인도 영화 등 제3세계 영화에 대한 애정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모리셔스와 프랑스의 두 가지 국적으로 가지고, 평생을 경계선상에 위치한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작가답게 영화에 대해서도 탈경계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시야와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에 대한 주제별 이야기 중간중간에 개인적인 영화 체험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막간(#)’처럼 집어넣어 독자들에게 잠시 쉬어갈 여유를 준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영화를 알게 해준 파테사의 편집기사 가비(Gaby)에 대한 추억, 오즈 야스지로가 살던 방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하루 묵었던 이야기,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니스의 갖가지 영화관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박찬욱, 이창동, 이정향의 인터뷰를 실었다.
한국 영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
한국에 대한 르 클레지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도 마지막 부분에 미래의 영화를 책임질 수 있을 주역으로 한국 영화를 거론한다. 저자는 한국 영화 특유의 역동성과 다양성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특색의 단초를 서로 다른 색깔의 감독들인 박찬욱, 이창동, 이정향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찾아보고 있다. 저자는 이 인터뷰를 위해 2007년 2월 한국을 방문하여 이 세 명의 감독들과 비공개로 만남을 가졌으며, 편집상 많이 축약된 프랑스판과는 달리 이번 한국어판에서는 인터뷰 분량을 원본에 가깝게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