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침투하고 침습당하는 자아, 그 위태로운 에로티카 소설.비평.에세이.논픽션 등 다양한 장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글쓰기는 어김없이 그 한가운데에 그녀의 ‘자아’를 새긴다. 아마도 그 자아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드라마틱한지, 그리하여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그룹에서는 흔치 않은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출신. 노르웨이 혈통의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전형적인 백인 미녀, 아이비리그의 영문학 박사지만 미술 비평과 소설과 신경정신의학과 심리학 논문을 쓰는 여자. 무서우리만큼 해박하고 지적이지만 상처받기 쉬운 여린 마음과 잘 벼린 칼날처럼 위태로운 신경을 지닌 여자. 걸출한 작가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작가 남편과 의외로 오랜 기간 충실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 그래서 이 믿기지 않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세계적인 작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아름답고 똑똑한 아내 시리, 라는 말로 요약되곤 하는 여자. 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바로 이 매혹적인 여자의 자아가 박살난 거울의 파편처럼 날카롭게 박혀 반짝인다. 픽션이 자아의 현실을 수많은 파편으로 해체하고 재현하고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 흥미진진한 여자의 자아는 모호하면서도 짙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으나 압도적으로 편재한다. 자아의 재현에 대한 이 집요하고 강박적인 관심은 나르시시즘보다는 인간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심리학적/신경정신학적 탐구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소재/주제를 통해 발현되는 기제다. 허스트베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학자이고, 감정과 지성이 융합되어야 파악하는 형용 불가의 현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주창한다. 자아의 핵심인 기억과 정체성이야말로 예술과 철학과 문학과 의학과 과학이 손을 잡아야만 파악할 수 있는 융합지식의 영역이라 본다. 허스트베트의 소설 쓰기는 이 융합지식, 감정과 지성을 통합한 현실의 인지를 실험하는 장이고 허구적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당당히 인지능력의 반열에 올려놓는 실천이며, 여기에서 사변과 정서와 감각이 어우러진 오로지 그녀만의 소설 세계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녀가 1992년에 쓴 첫 소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이러한 탐구의 원점으로서 훗날 이어진 화려한 이야기들의 근원을 되짚어 가늠하게 해준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의 주인공 아이리스 베건은 최초로 탄생한 시리 허스트베트의 거울상이고 처음부터 적나라하게 이 사실을 공표한다. 아이리스Iris라는 이름부터가 시리Siri의 스펠링을 거꾸로 뒤집어 만든 언어유희다. 미네소타 출신, 노르웨이 문학교수였던 아버지, 컬럼비아 영문과 대학원생, 편두통에 시달리는 불안한 금발의 미녀, 불과 몇 페이지 만에 밝혀지는 모든 캐릭터의 코드가 시리를 가리킨다. 다만 특이점은 끔찍하게 불안한 정체성이 철저히 일인칭으로 서사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아이리스는 이야기가 세계를 보는 눈, ‘홍채Iris’이다. 그런데 이 시선이 치명적으로 불완전하고 분절적이다. 유기적 서사가 아닌 단편 연작에 가까운 소설의 형식도 차분하고 일관된 서사로서 자신이 지각하는 세상을 표현할 수 없는 화자의 좌절을 보여준다. 모닝 씨를 만나는 첫 일화부터 아이리스에게 허락되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파편적 정보들을 조합해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사방에 산재해 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흔들리는 자의식은 분명 미성숙의 표징이다. 그리고 흔히들 ‘청춘’이라고 부르는 이 미성숙의 상태가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의 기이한 공포와 짜릿한 매혹의 근원이다. 시야가 제한된 미완의 자아가 타자를 만날 때는 언제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가능성이 공존하고, 이 위태로운 가능성에 몸을 던질 용기야말로 젊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원작의 제목인 ‘눈가리개Blindfold’는 대중문화에서 흔히 변태적 성애의 도구로 유통되지만, 불안한 인지, 자아와 타자의 위험한 혼재, 섬뜩한 노출상태, 용감한 자아의 방기, 그로 인한 에로티시즘, 이 모든 것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도 하다. 아이리스가 이 소설에서 잇달아 만나는 모든 타자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아이리스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동시에 에로틱한 체험을 제공한다. 죽은 여자의 소지품에 페티시가 있는 모닝 씨의 달처럼 흰 목덜미와 흐트러진 매무새, 불충하고 의뭉스러운 스티븐의 매혹적인 육체, 에로틱한 자아 방기의 순간을 사지 훼손의 위협으로 바꾸어 재현한 조지의 사진, 편두통에 시달리며 꿈과 현실을 오가는 혼미한 상태에서 입안을 침습해 들어오던 O 부인의 젖은 혀, 정체성의 근원까지 흡입하려 드는 허구적 캐릭터 클라우스, 그리고 실크 눈가리개를 한 아이리스를 곁에서 보호하며 뉴욕의 밤거리를 함께 걸을 만큼 전적인 믿음을 주었던 마이클 교수의 강간 시도, 이 모든 아이리스의 이야기를 왜곡하고 전유하려는 뒤틀린 패리스까지. 에로틱한 체험이 강간으로.위협으로.폭력으로.인격적 살해로 화하는 찰나들을 몸으로.마음으로.지성과 감성으로.온 존재로 겪으면서 아이리스는 힘겹게 정체성의 경계를 구획하려는 사투를 벌인다. 이 사투 속에서 사랑과 죽음의 경계, 이성과 광기의 경계가 한없이 흐려진다. 언어와 정신과 신체의 자치성을 사수하는 이 싸움은 여성이기 때문에 한층 치열해진다. 여성은 이 사회에서 보통 재현의 주체가 아니라 재현의 대상이 되는 탓이다. 섬뜩하고 짜릿한 타자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혼재되는 경험을 자처하고 살아남음으로써 아이리스는 자아의 경계를 구획하는 힘, 사랑의 주도권을 쥐고 창작하는 힘을 서서히 획득한다. 따라서 이 소설이 ‘병든 심리’의 치밀한 연구라는 일부의 주장은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피상적 읽기의 소산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에로스와 타나토스 속으로 ‘당신을 믿고 추락했던’ 경험을 통해 쉽게 포획당하지 않는 독특한 여성 작가의 사이키가 피닉스처럼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가 위태롭게 얽히는 순간, 감각과 지성과 감정이 총체적으로 발동하는 강렬한 에로티시즘은 이 소설에서 탄생해서 지금까지도 시리 허스트베트의 글쓰기를 여전히 가르고 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선형 번역가가 쓴 글입니다.) [미디어 소개] ☞ 조선일보 2017년 4월 1일자 기사 바로가기 ☞ 매일경제신문 2017년 3월 31일자 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