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내전과 위생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그쳐야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어떻게 전달될까. 『내전과 위생: 인간의 출현과 자본-식민주의 비판』은 탈식민지론, 표상문화론, 문화정치를 연구하는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김항 교수가 지난 7~8년 동안 쓴 글들을 고치고 엮은 것이다. 이 글들은 논문으로, 비평으로, 발표로 세상에 선보인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큰 틀에서 ‘내전과 위생’이란 주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저자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칼 슈미트와 조르조 아감벤을 읽으며 내전에 몰두했고, 자연스레 위생이란 주제에 이끌렸다. 그것은 이론적 관심만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상황 또한 내전과 위생의 개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스케치했다. 2018년 가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총여학생회를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른바 백래시(backlash)를 이끈 치졸한 단결이 곳곳에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때였다. 단결한 이들은 당시 총여학생회가 기획한 강연회를 빌미 삼아 폐지를 선동했고, 안팎의 지원으로 기세등등해진 끝에 그럴듯한 카드 뉴스까지 만들었다. “자의적 해석에 따른 선택적 인권 보호의 위험”을 극복하여 “보편 인권에 따른 모든 **인의 인권 보호”를 추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상황은 투표로 이어졌고, 총여학생회는 결국 폐지되었다. 그들의 행태는 전형적인 내전의 전개였다. 그것은 오랜 짓눌림을 뚫고 나온 목소리를 “**인”이라는 전칭적 규정을 내세워 잠재우는 혐오의 폭력이었고, 필연적으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위생화를 동반했다. 진보와 변혁에 드리운 남성중심주의를 문제화하며 등장한 페미니스트 총여학생회의 역사와 정치가 “보편 인권”이란 미명 아래 “역사 세탁(history laundry)”의 대상이 되었다. 길고 험난했던 총여학생회의 역사와 정치는 치졸한 집단이 휘두른 보편 인권이란 사이비 규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장 해제되고 말았다. 모 대학의 총여학생회 폐지를 둘러싼 난장판은 보편 인권을 내세운 인권의 탈역사화이자 탈정치화였다. 저자에게 내전과 위생이 이론 차원에서뿐 아니라 상황이 강제한 관심이었던 까닭이다. 에필로그에서 참조했듯 내전과 위생에서 비롯된 혐오의 폭력은 유력 정당 대표의 장애인 시위 관련 발언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는 ‘선량한 시민’이란 전칭적 규정으로 장애인 시위를 특정 집단의 이기적 행위로 몰아세웠다. 낯설지만은 않다. 인간, 국민, 시민뿐 아니라 지역, 학교, 직장 등 구성원 모두를 균질적으로 호명하면서 소수자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시도는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