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블레이드 러너>인가
시각 문화와 SF에 미친 영향부터
인류세와 AI, 불평등 자본주의까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SF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시각적인 밀도가 높고 사상적으로도 선구적이었기에 전 세계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받아왔다. 한국에는 1989년에 처음 TV에서 방영된 이래, 극장 개봉과 DVD 발매를 거쳐, 현재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전설로 회자되어온 작품, 오늘날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본격 비평서로서, 본편(1982년작)과 속편(2017년작) 모두를 아우르며 작품에 담긴 의미를 다각도로 짚어본다. 이 책의 기획자 임태훈은 “2020년대의 대한민국,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이 책을 매개로 <블레이드 러너> 세계관의 쓸모를 발견하게 될 이들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저 ‘옛날 영화’로 규정하고 치워버리기에는 <블레이드 러너>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너무나 현재적이고, 심지어 미래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취지에서 세심하게 선별된 주제들을 각 분야 최고의 필진 10명이 맡아 집필했다. 시각 문화와 SF 장르에 끼친 심오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 현대 사회의 급박한 화두인 인류세와 AI, 불평등 자본주의 등의 맥락에서 이 작품을 읽어낸다. 또한 페미니즘이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인지도 정면으로 다룬다. 이를 통해 10인의 필자들은 <블레이드 러너>를 새로운 시대에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재탄생시킨다.
기존 팬들에게는 <블레이드 러너>를 기념하는 좋은 선물임은 물론, 초보자들에게는 영화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영화의 본편과 함께 속편까지 통합하여 다룬다는 점에서, 전 세계 <블레이드 러너> 연구 또는 팬덤의 맥락에서도 기념할 만한 출간이라 하겠다.
기획자가 말하는
이 책의 내용과 구성
그동안 <블레이드 러너>를 이야기했던 동어반복적인 주제나 담론과 차별화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고민한다.
- 한국 사회의 풍경이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를 닮은 까닭은 무엇일까?
- ‘사이버펑크’는 어쩌다 ‘헬조선’의 별칭이 된 걸까?
- 오염된 먼지로 망해가는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는 인류세 한반도의 위기를 왜 이토록 닮아 있는 것일까?
- 레플리컨트의 비참함과 노동자의 절망이 쌍둥이처럼 닮은 이유는 무엇일까?
- 여성을 남자들이 아무렇게나 다뤄도 상관없는 인형 취급하는 이 영화를 한국의 SF팬들은 왜 불편해하지 않았을까?
- 우리 시대의 건축과 일상 공간에 <블레이드 러너>의 상상력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이 영화가 성경에서 모티브를 빌려왔음에도 결단코 교회에서 볼 만한 영화가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 원작 소설의 작가 필립 K. 딕이 살아 있었다면 <블레이드 러너> 속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 네온 조명을 남용한 사이버펑크 풍의 사진이 감추고 있는 우리 세계의 민낯은 무엇일까?
- 사이버펑크가 빤하고 후진 상상력의 단순 반복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일까?
- <블레이드 러너> 감상의 음향적 충격은 시리와 빅스비와 대화하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 이 영화를 평생 좋아했고 인생을 바꾼 영화라고까지 말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SF 연구자와 창작자는 물론, 문학과 예술, 과학기술사 분야에서 맹활약하는 필자들이 참여했다. <블레이드 러너> 세계관의 도시, 건축, 공간에 대해 분석하고(윤원화), ‘기후 픽션’으로 이 영화를 재해석하며 인류세의 위기를 성찰한다(강연실). 또한 자본주의의 미래사를 탐구하는 정치경제 비평으로 <블레이드 러너>를 재발견한다(임태훈).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이지용), 성경적 세계관의 문제(주원규), 사이버펑크 장르의 흥망성쇠를 냉철하게 평가한 글(김창규) 역시 필독해주길 바란다. 사이버펑크 풍의 사진 문화에 대한 분석(김현호)과 영화의 사운드스케이프에 대한 비평(곽영빈)은 지금껏 그 어느 책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블레이드 러너>론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앞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좌우하게 될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페미니즘(손진원)에 대한 도전적인 비평과, <블레이드 러너>를 오랫동안 사랑해온 팬들에 대한 인터뷰(김효진)도 담았다.
이 책의 필자들이 한결같이 정색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현실에 대한 성찰 없이 추억을 곱씹을 뿐인 복고 취향의 관심이다. 우리는 차라리 이 영화를 전혀 모르는 이들의 관심을 갈구한다.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첫 번째 <블레이드 러너> 체험일 수 있다면 진실로 모든 게 완벽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영화가 새로운 싹을 틔우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