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근대 미학 텍스트
도서출판 마티의 미학 원전 시리즈로 만나다
예술이나 아름다움에 관한 물음은 철학의 주요 문제였으나 감성적인 것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감성적 판단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부터 18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자율적인 예술의 등장,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 등과 더불어 예술과 아름다움은 독자적인 문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취미론과 숭고에 대한 탐구, 순수 예술에 대한 물음은 ‘미학’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학문을 태동시키기에 이르렀다. ‘미학 원전 시리즈’는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출현한 이 미학적 논의를 선도한 텍스트들을 선보인다. 근대 미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지만 국내에 번역된 적 없는 이 텍스트들은 미학 연구, 나아가 서구 사상사의 빈틈을 메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학 원전 시리즈 2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분해 체계적으로 논한
경험론 미학의 고전”
숭고의 시대
‘숭고’(sublime)는 최근 인문학과 예술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아름다움’에 비해 숭고의 의미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숭고한 죽음’, ‘숭고한 희생’, ‘호국 영령의 숭고한 뜻’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숭고는 미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도덕적 의미를 강하게 띤다. 또 숭고는 한참 잊혀 있다가 포스트모더니즘(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가 대표적이 예이다)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숭고’는 ‘아름다움’과 함께 좁게는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미학과 예술론, 넓게는 감성론에서 으뜸가는 주제였다.
역사적으로 숭고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가치가 의심되던 시기에 더욱 각광받았다. 그리스의 고전 미학이 와해된 고대 말기인 1세기에 롱기누스(Longinus)에 의해 처음 철학적으로 정의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르네상스 이래 지탱되어온 미학적 인본주의가 의심의 대상이 된 프랑스혁명기 전후에 다시금 숭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비슷한 맥락에서 안정적인 규범이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이야말로 숭고의 시대인 것이다.
숭고와 아름다움을 구별하고
각각의 기원을 분석한 고전 중의 고전
아름다움은 인간 인식의 범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화, 비례, 균형 등의 문제이며, 숭고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위력에 관한 문제이다. 숭고는 모든 법칙과 한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며, 인간 이성의 좁은 포용력을 비웃는다.
예컨대, 우리는 한 송이 장미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만 대양의 파도와 험준한 산을 보고도 즐거움을 체험한다. 이 두 감정과 정서는 동일한가. 미켈란젤로의 완벽한 인체에서 느끼는 정서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일그러진 신체에서 느끼는 감정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이것이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가 밝히고자 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처럼 『탐구』는 아름다움의 하위 개념으로 간주되어온 숭고를 독립적인 미학적 고찰 대상으로 삼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논구했다.
한편, 버크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어떤 대상을 체험하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채택하는데, 수많은 사례를 면밀히 분석하고 예외를 배제해나가는 서술 방식은 경험론적 서술의 정수로 꼽을 만하다.
『탐구』는 숭고와 아름다움에 관한 근대적 이해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저서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다면 『판단력비판』은 『탐구』의 영향 아래 있다. 아름다움과 숭고에 대한 경험론적·심리학적 설명을 시도한 책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라고 한 칸트의 평은 이 책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준다.
용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살린 섬세한 번역
인간의 심리 상태에 기반을 두고 아름다움과 숭고를 분석한 책인 만큼 비슷한 감정 상태를 뜻하는 용어의 번역에 특히 신경 썼다. 예를 들어, ‘즐거움’에 해당하는 pleasure, joy, delight는 각각 즐거움, 기쁨, 안도감으로, 감정에 해당하는 emotion, passion, feeling을 감정 또는 촉각 또는 느낌으로 구분해 번역하였다. 번역어 채택 기준과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에 들어가기 전 ‘번역어와 관련하여’에서 자세히 밝혔다.
이 책은 2006년에 출간된 『숭고와 아름다움의 기원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개정판으로, 원서 제목의 ‘ideas’를 ‘이념’으로 옮겼던 것을 ‘관념’으로 수정하는 등 원문 대조를 통해 초판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미학 원전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서양 미학 태동기의 미학 원전을 소개하는 미학 원전 시리즈의 목표는 당대 영국, 프랑스, 독일의 논의를 폭넓고 균형 있게 아우르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시리즈로는 프랑스의 철학자 샤를 바퇴(Charles Batteux)의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는 예술 장르들』(Les Beaux-arts réduits à un même principe),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의 『상상력의 즐거움』(Pleasures of Imagination),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의 『아름다움과 덕에 대한 우리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탐구』(Inquiry into the Original of our Ideas of Beauty and Virtue) 등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