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세 일본 노인, 조선인 전우를 위해 법정에 서다
‘아베를 용서할 수 없는’ 일본인의 양심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뉴스에 등장하는 ‘데모하는 일본인들’은 누구인가
일본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자, 베스트셀러 『사회를 바꾸려면』의 저자 오구마 에이지
원제 : 『살아서 돌아온 남자(生きて歸ってきた男)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ある日本兵の戰爭と戰後)』
일본군 출신 72세 노인, 조선인 전우를 위해 법정에 서다
신간 『일본 양심의 탄생』 주인공은 1925년생, 올해 한국 나이로 91세인 일본인 오구마 겐지(小熊謙二)이다. 이 책은 게이오대 역사사회학자 교수인 저자가 아버지의 일생을 인터뷰하면서, 민중사, 개인사적 서술을 통해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그려낸다. 주인공 겐지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 전(前)‘일본군’이었던 전우 오웅근을 위해서였다.
1945년, 겐지는 스무 살의 나이로 일본군에 입대하자마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3년간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그와 같은 ‘일본군’ 조선인도 있었다. 그는 재중동포 오웅근이다. 만주 출신의 조선인으로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국민고등학교(중학교 과정)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기를 지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참가했다가 겐지가 있던 소련의 치타 제24지구 3분소 수용소로 오게 된다. 책에 따르면, 당시 소련의 포로가 된 ‘조선인 일본군’의 숫자는 약 1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으로 귀환한 그는 옌볜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중국 문화혁명의 혼란 속에서 ‘일본군 출신’이란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일본 정부는 ‘일본인 국적자’들에게만 ‘위로금’의 형식으로 전쟁피해를 ‘위로’하는 애매한 보상 사업을 펼쳤다. 현재 중국 국적자인 오웅근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 살던 조선인 오웅근은 ‘일본국적자’였기 때문에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되었었다. 그의 국적은 그의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1910년 경술국치일 이후 일방적으로 일본국적을 부여받았다. 그러다 패전 직후였던 1947년, 일본 정부는 「외국인등록령」을 시행해 일본 국적인 사람 중 조선 호적·대만 호적 등 일본 호적 이외의 사람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1952년 4월에 연합군 총사령부(GHQ) 점령이 끝나자 일방적으로 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오웅근을 비롯한 조선인·대만인 전 일본군 장교는 단 한 번도 국적 선택권을 가진 적이 없을뿐더러 ‘일본인’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었지만 모르는 사이에 일본 국적을 상실해 연금이나 보상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겐지는 그 제도가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금’을 신청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부전 병사의 모임’의 회보를 통해 오웅근과 편지로 재회하게 되면서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징집해놓고 지금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지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후 그를 위해, 일본 정부에 ‘위로금’을 신청했고, 위로금 10만 엔의 절반을 오웅근에게 보내게 된다.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마음을 담는다’라는 편지글과 함께. 하지만 오웅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겐지에게 공동원고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결국 둘은 1996년 9월 도쿄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일본계 일본인 전 포로’와 ‘조선계 중국인 전 포로’가 공식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 담긴 일본 민중의 역사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과 다르다. 『사회를 바꾸려면』(동아시아, 2014)의 저자이자, 일본 시민운동의 아이콘, 데모하는 지식인이란 수식어를 가진 일본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가 이번에는 한 개인의 생애사로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구현한다. 유력자 계층의 시선에서 쓰여지곤 했던 기존의 역사서술서와 차원이 다른 개인사, 생애사 연구이다. 도시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민중사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저자의 아버지인 오구마 겐지이다. 그는 일본군이었다.
이 책은 ‘전쟁 체험’의 범위를 본격적으로 넓힌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전쟁 전의 삶과, 전쟁 후의 삶을 샅샅이 추적한다. 오구마 겐지의 일생을 통해 전쟁이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전후 평화의식’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아버지의 인생사를 각 시대의 사회적 맥락에 위치시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 서술이 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해낸 것이다. 한 인물의 인상과 성격이 아닌, 매 시대 그가 행했던 선택, 일, 그에 대한 결과를 그저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입체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군국주의자와 자민당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오구마 겐지는 단 한 번도 군국주의자와 자민당에 투표한 적이 없다. 난징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을 보며, 책으로만 세상을 배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몸으로 겪은 전쟁은 그만큼 아픈 상처였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직후 50년대 초반에는 사회당, 공명당에 투표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없었지만 ‘보수 정당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였다. 또한 전쟁 전의 군국주의에 여전히 치를 떨었는데, 그들이 패전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절대 그들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1956년 경, 자민당이 창당에도 변함없이 ‘혁신계’에 투표했으며 50여 년이 흘러 2009년, 84세의 겐지는 정권 교체의 희망을 걸고 민주당에 투표하기에 이른다. 겐지의 표심은 일생 동안 반(反)군국주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인내심으로 고도성장과 버블경제,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휘청이는 일본사회를 살아냈다. 포로 출신에 대한 차별로 대기업 취업은 그 기회부터 차단당했지만,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중산층’의 계열에 올랐다. 물론 겐지와 그의 아들 저자는 결코 이것을 ‘성공신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고도 성장의 흐름에서 돈을 벌었고, 운이 좋게 공영 주택에 입주한 것 등의 사회·경제적 흐름 속에서 그저 오롯이 버텨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겐지는 지금 지역 사회와 시민 단체의 회원으로서 사회 참여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전범국가 일본의 전쟁피해보상 원칙과 이에 대한 오구마 에이지의 비판
최근 미국인 포로의 강제노동에 대해서 사과를 표명한 미쓰비시 공업은 한국인 징용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침묵하고 있다. 군함도 세계유산 논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포로의 강제노동과 식민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 노동의 성격이 ‘법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인은 자국인에 의한 노동이었고, 미국인 포로는 타국인에 의한 노동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당시 국적은 ‘일본’이었기에 일본인들과 함께 ‘총동원법’에 의해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동원되었고, 이를 근거로 식민지 민중의 강제노동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외국인 포로의 강제노동은 국제노동기구가 규정하는 강제노동에 해당되기 때문에 사과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위안부 전쟁피해 보상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지점은 지난해 논란을 일으켰던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상반된다. 이 문제는 전쟁 피해 보상의 주체가 ‘(일본) 국가’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박유하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했던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에는 ‘일본 정부’의 속죄하는 마음이 담겼으므로 이것이 ‘보상’이 아니라고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