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배우고 때로 읽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씀이다. 공자의 말씀이 아니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학습을 하지 않으면 온전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 익히 안다. 서양에 이런 공자의 말씀을 따라 한평생을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산 사람이 있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설 이름일 프랑스의 수도사 세르티양주는 『신학대전』으로 가톨릭 신앙을 집대성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권위자이다. 『공부하는 삶』은 그가 쓴 책 가운데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고 가장 유명한 책이다. 1920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 책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미권에서도 지금까지 읽힌다. 지금까지도 이 책을 공부의 길잡이로 삼아 귀중한 영감과 통찰력,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세르티양주는 지성인을 ‘지적인 일’이라는 소명에 따라 ‘성별’(聖別)된 존재, 신성한 일에 쓰이도록 선택받은 존재라고 본다. 세르티양주는 “지적 소명은 다른 모든 소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능과 능력에,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종의 내적 충동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지성인에게 공부는 삶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농민이 농사일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듯이 지성인은 공부를 위해 삶 자체를 규율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여 그가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먹고사는 일을 도외시하고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두 시간을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가? 그 두 시간을 온전히 열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자신감을 가져라. 아니,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그러나 저자가 “공부하는 사람들은 궁핍과 오랜 훈련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더러는 인간을 넘어서는 끈기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듯 공부하는 삶은 무척이나 고된 삶이기도 할 것이다. 역자가 정리한 것처럼 소명을 따르는 공부는 명성이나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외적 성공을 추구하는 공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는 무관한 절대적 척도에 따라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는 공부다. 이렇듯 공부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맛보고자 하는 예비 지성인에게 이 책은 곁에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으며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아주는 잠언서이다. 이 책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실제로 자신의 삶에 적용한 한 지성인의 글을 아래 전재한다. 『공부하는 삶』의 영문판 앞에 실린 조지타운대학교 정치철학 담당 교수 제임스 샬의 글이다. 사유의 기쁨과 고통에 관하여 우리 대다수는 나이가 들어서 누군가 우리가 젊었을 때 어떤 것에 관해, 대개는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우리의 삶이라는 기획에서 크나큰 도움이 되었을 만한 어떤 책들에 관해, 특히 우리가 사태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도왔을 만한 책들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런 책들 가운데 일부는 진실, 현실, 이치에 대한 책이지만, 상당수는 오히려 ‘나는 어떻게 알기 위해 애쓰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책이다. 사실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다른 종류의 배움』(Another Sort of Learning)이라는 책을 직접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진지하게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이 될 만한 책들 가운데 하나로 ‘지적인 삶’에 관한 세르티양주의 책을 언급했다. 그러나 세르티양주의 책은 좋은 출발점 그 이상을 제시한다. 그는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어떻게 읽고 쓸 것인지, 어떻게 시간을 규율할 것인지, 더 나아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규율할 것인지에 관해 분명하게 말한다. 또한 그는 진정으로 지적인 삶이라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인 정신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관조적 삶은 인간이 열망해야 하는 무언가라고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우리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 것은 아닌지에 관해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적인 삶이 고귀한 것임을 모호하게나마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삶을 달성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지에 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아무도 그러한 조건에 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짐작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야 지혜가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알기만 했던 것들을 달성하도록 도왔을 방법들이 과연 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 위대한 프랑스 도미니크회 수도사 세르티양주(1863~1948)는 1920년에 『공부하는 삶』(La Vie Intellectuelle)이라 이름 붙인 책을 썼다. 이 책은 즉시 성공을 거두어 판을 거듭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최근에 나는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젊은 장교에게 이 책을 추천했는데, 그는 앞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칠 예정이었다. 그는 미국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 이 책을 주문했지만 당시 절판된 상태였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마침 이 출판부 마케팅 책임자에게 편지 쓸 일이 있었던 나는 이 책이 절판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그는 출판부에서 개정판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나는 이 책에는 새로운 서문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컴퓨터 사용자들이 파일 카드에 메모를 적어두라는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읽고 이 책을 덮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나는 어떤 컴퓨터 사용자는 나의 도움 없이도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컴퓨터에 맞추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컴퓨터가 표준적 도구가 되기 전에 쓰였다는 이유로 이 영원한 책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기지는 않을지 우려되었다. 아무튼 다행히 그 훌륭한 출판부 책임자는 나에게 새로운 서문을 써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기꺼이 쓰고말고! 어떤 의미에서 이 간략한 서문은 이 탁월하고 쓸모 있는 책이 계속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와 대학교와 대학원의 젊은 학생, 노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계속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의견이다. 나는 대개 성 토마스에 관한 수업에서 이 책을 사용했는데, 그 밖에도 내가 이 책을 수업에서 사용할 때마다 대학교 학생들은 나중에 이 책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 책이 그들에게 대학에서뿐 아니라 삶 전체에 걸쳐서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지적 호기심을 지속하는 방법에 관해 아주 많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넌지시 말했듯이, 이 책의 첫인상은 예스럽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인상은 독자에게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세르티양주는 어떻게 메모를 하는지,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고 어떻게 출간하는지, 어떻게 메모를 정리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사유를 조직하는지에 관해 부지런히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세르티양주가 사용했던 펜과 초기 타자기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그가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교한 컴퓨터와 출력장치를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예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세르티양주가 탁월하게 쓴 바 있고, 이 책을 쓰도록 영감을 준 토마스 아퀴나스가 13세기에 단 25년 동안만 생산적으로 활동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1920년대의 세르티양주조차 가지고 있던 장치들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퀴나스는 놀랄 만큼 많은 양의 찬란하고 심오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퀴나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신 컴퓨터가 있었다면 과연 아퀴나스는 더 많이 혹은 더 잘 쓸 수 있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컴퓨터는 아퀴나스에게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성서를 포함하여 그 이전의 위대한 저자들의 모든 지식에 정통하기 위해 엄청난 기억력과 신비로운 역량을 계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 토마스도 이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여러 책을 읽어야 했지만, 이를 통해 그는 어떻게 기억력과 역량을 계발하는지를 배웠다. 세르티양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