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살아 숨 쉬는 내밀한 경제 이야기
“영화는 뛰어난 경제학 교재다!”
누구나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없는 학문으로 느끼는 경제학, 좀 더 쉽게 배울 수는 없을까? 《시네마노믹스》는 영화 속 이야기를 통해 경제학을 살펴보고, 영화에 경제학적 상상력을 입혀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딱딱한 경제 기사가 독자에게 얼마나 가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한국경제신문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누구나 즐겨 보는 영화 속에 숨어 있는 경제 논리와 현상을 말랑하고 쉽게 풀어낸다.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꺼내준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스무 살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서로를 좋아한 것도 모르고 30대 중반이 돼서야 다시 만나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순수한 마음, 서툰 사랑 표현과 어설픈 헤어짐으로 대표되는 첫사랑은 어쩌면 ‘논리’로는 가장 설명하기 힘든 일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경제학자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까? 남자 주인공이 약혼녀를 심드렁하게 대하는 이유를 경제학은 ‘한계효용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설레던 사랑이 갈수록 무덤덤해지는 건 사랑의 효용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이 첫사랑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위험 회피 성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사랑을 얻어서 생기는 효용보다 약혼녀를 버렸을 때 생기는 비용이 더 크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 행동의 근저에는 이런 경제 원리가 깔려 있다. 우리가 왜 비싼 돈을 지불해 가며 명품을 사는지, 또 당첨 확률이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도 낮은 복권 구매를 멈추지 못하는지, TV를 통해 접하는 슈퍼스타는 어떻게 탄생하는지 등도 마찬가지다. 《시네마노믹스》는 다양한 삶 속의 수많은 스토리가 꿈틀거리는 영화 속에도 경제 원리가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일깨운다.
도로시는 왜 은색 구두를 신었을까
도로시라는 소녀가 회오리바람에 날려 마법의 나라에 떨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금본위제와 은본위제를 둘러싼 정치 대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통화 우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의 원작 소설 《오즈의 놀라운 마법사》를 쓴 미국의 동화 작가 프랭크 바움은 이 작품을 순전히 동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쓴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미국은 1880년경부터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의 양이 부족해 경제 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화폐를 충분히 찍어내지 못했다. 그 여파로 20여 년간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화폐 가치는 급등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주로 돈을 빌리는 입장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고, 이에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은본위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상대적으로 값싸고 덜 희소한 은을 기준으로 더 많은 화폐를 발행해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자는 것이다.
이 작품이 명시적으로 은본위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즈(Oz)’가 금, 은 등을 재는 무게 단위인 ‘온스(ounce)’의 약자이고, 주인공 도로시가 불가사의한 은색 구두의 힘으로 금을 상징하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작가가 은본위제 개혁을 지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에 나온 양철인간, 허수아비, 회오리바람, 마녀, 마법사, 사자, 난쟁이는 1890년대 정치 풍자만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던 상징이었다. 허수아비는 농민을, 양철인간은 산업 노동자를 대변한다. 난쟁이는 평범한 미국의 시민을 상징하며, 그들을 지배하던 서쪽마녀와 동쪽마녀는 기업과 금융 등 산업화 세력을 은유한다. 정치인은 마법사로 표현됐고, 회오리바람 또한 당시 제3당인 민중당의 출현 등과 같은 정치적 격변기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결과적으로 <오즈의 마법사>는 디플레이션으로 고통 받던 당시의 정치 경제 상황을 풍자한 동화이면서 동시에 은본위제를 대중에 널리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다만 영화에서는 은색 구두가 붉은색 구두로 바뀌면서 정치색이 빠지게 됐는데, 이는 단지 화면에 은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감독의 판단에서였다.
완벽한 정보도 완벽한 판단도 없다
조선 시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의 주인공 ‘내경’은 얼굴을 보면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천재 관상가다. 당대의 정치가였던 좌의정 김종서는 그를 임금인 문종에게 데려간다. 병세가 깊었던 문종의 가장 큰 고민은 어린 세자의 왕좌를 누가 빼앗으려 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문종은 내경에게 역모를 일으킬 만한 사람의 관상을 살펴볼 것을 명한다.
모든 정보 가운데 가장 값진 정보를 꼽으라면 아마 ‘정확한 미래’에 관한 정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해 얻으려고 하는 것도 대부분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예측이다. 영화 속 내경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앞날까지 알아맞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내경이 단시간 내에 한양에서 유명인사가 되고 임금까지 그를 찾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종의 걱정은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몇 명 있지만 누가 왕위를 찬탈할 역모를 꾸밀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정보경제학이다.
경제정보학은 정보가 불완전한 상황에서는 이를 변수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경제 주체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양이 차이가 날 때 최종 결과의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경제 주체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라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 같은 노력을 ‘선별(screening)’이라고 한다. 문종이 내경에게 신하들의 관상을 살피라고 한 것은 일종의 선별 행위인 셈이다.
내경은 왕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차례대로 살피기 시작한다. 내관으로 변장해 상대방을 찾아가 왕이 그림을 하사했다며 관상을 보는 식이다. 그는 문종이 가장 경계하던 수양대군에 대해 ‘작은 쾌락에 만족해 살아가는 인물’로 평가한다. 문종은 내경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안심한다. 하지만 이는 수양대군의 교묘한 책략이었다. 역모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찬 수양대군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관상가 앞에 자신의 심복을 대신 내보냈다. 문종이 자신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 관상가를 기용해 주변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 그 관상가가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모두 알고 있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을 오판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역사의 한줄기를 바꿨다.
내경은 영화 막바지에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은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라고 말한다. 완벽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한탄이었다. 큰 정보와 작은 정보를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정보의 흐름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지력의 유한함에 대한 자조이기도 했다. 어쩌면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 현실 경제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