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창조적 카멜레온, 세계는 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가?
2010년 테드(TED) 컨퍼런스에서 ‘건축은 어떻게 음악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는가?’라는 주제의 강연이 열렸다. 강연자인 데이비드 번은 아프리카 초원, 고딕 대성당, 왕궁, 오페라 극장, 연주전용 홀, 등 시대에 따라 달라진 연주 공간에서 음악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기 쉽게 설명해 열띤 호응을 이끌어 냈다. 강연 말미에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이며 창조의 모델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데이비드 번 자신이 가장 잘 실천해 오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방식과 다양한 작업으로 자신을 표현해 온 번은 2008년 뉴욕에서 혁신적인 설치미술 프로젝트를 벌였다. <Playing the Building>은 빈 건물을 악기처럼 사용하는 프로젝트였다. 번은 아래 사진처럼 빈 건물 곳곳을 오르간 한 대와 연결해 방문객들이 직접 연주해 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 예술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놀라울 만큼 창조적인 걸작이었다. 다음 해 미국의 경영 잡지 <크리에이티비티>는 지난해 가장 창조적 활동을 보인 50명에 데이비드 번을 선정하면서 그를 가리켜 ‘창조적 카멜레온’이라고 칭했다. 지난 30여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온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데이비드 번, 전 세계로 광활하게 퍼져 있는 신경 회로를 항해하다.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은 데이비드 번이 전 세계 여러 대도시를 자전거로 관통하며 보고 만나고 생각한 것들을 담은 관찰과 사색의 기록이다. 순회공연 때마다 가져간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스탄불, 샌프란시스코, 런던, 베를린, 마닐라, 뉴욕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 몰랐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그의 눈에 비친 도시는 ‘우리’라는 사회적 동물의 뿌리 깊은 믿음과 무의식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만든 ‘벌집’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들을 중요하다고 믿으며, 이런 생각과 믿음을 어떻게 체계화하는지 드러나 있다. 생명체 안의 유전 인자들이 화학적인 실마리를 만나 닭의 간이나 인간의 심장으로 발전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장소에도 정치와 행동, 문화적인 표현들을 촉발하는 인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필리핀 거리의 비슷비슷한 가판대들을 보고 마치 인간의 유전자에 내재된 건축 감각이 동네와 시장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고민한 것 같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을 향한 그의 무궁무진한 호기심은 끝없이 이어지고 인간과 자연, 도시와 건축, 역사와 정치, 문화와 예술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그의 예술가적 통찰력과 예리한 감성이 빛을 발한다.
현실 부정은 아무래도 생존 기제에서 발전한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정신 능력이 있어야 사냥이나 구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심란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정보를 차단하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현실 부정의 기술과 그 복잡한 행위는, 최소한 필요한 순간만큼은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관점이 달라지는 순간 진실과 대면하는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은 단점이나 결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매우 필요한 생존 기제다. 공교롭게도 우리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이다. - 본문 117쪽(베를린)
신기하게도 우리(현대를 살아가는 서양인) 눈에는 1층에 있는 전형적인 서양 그림이나 조각보다 오스만제국과 아시아의 서예 작품들이 더 감동적이었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에 물든 서양 작품들을 보면 동양을 낭만적으로 바라보았던 옛날의 식민지 시대가 생각난다. 과거로 치부하고 싶은 그 시대와 우리의 선입견, 독선이 생각난다. 반면에 이 서예 작품들은, 문자를 예술로 바라보고 말을 아름답게 가시화된 생각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서양 정서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발상과 엄청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본문 125쪽(이스탄불)
밤 문화는 또 다른 세상이자 동전의 다른 면이다. 밤 문화를 들여다보면 정치인과 공직자의 빤한 술책을 받아 적는 것보다 역사와 정치의 어떤 순간을 좀 더 진솔하게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바이마르 카바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조였다는 둥, 펑크록이 레이건 시대의 어두운 그늘을 반영한 음악이었다는 둥, 쉽게 들리긴 해도 밤 문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은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뉴욕 경제가 바닥을 쳤을 때 스튜디오 54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린 디스코텍와 CBGB뉴욕에 있던 음악 클럽 가 동시에 전성기를 구가한 게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 본문 183쪽(부에노스아이레스)
내가 이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또 있다. CD 한 장에 담긴 모든 곡을 한 가지 주제로 묶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같은 주제로 묶인 곡들이 서로 연결되면 다른 의미가 더해질까? 하긴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같은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CD를 만들면 듣는 사람도 주인공의 인생과 감정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을 테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노래들은 좀 더 충만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결된 노래들이 순환을 이루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노래들을 합한 것보다 커질까? 약 1년간 참고도서를 읽고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정치와 역사가 일개 개인의 정신적 색안경과 비슷하다는 해밀턴?패터슨의 주장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듯한 이멜다의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본문 193쪽(필리핀)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깊고 어두운 부분들을 건드린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 가엾은 사이코들은 극단적인 어둠이나 빛과 소통하고 난 뒤 멀찌감치 뒤로 떨어져 있을 줄은 모른다는 사실이다. 거리를 둘 줄 아는 것, 객관성을 유지하는 척할 줄 아는 것은 ‘교양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살아가는 데 유용하고 어쩌면 필수적인 사회적 기술일 수 있지만, 이것을 기준으로 창작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 본문 328쪽(샌프란시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