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돌봄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1 돌봄이 초라한 사회 아픈 아버지를 돌보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한 20대 청년의 항소심 판결이 최근에 있었다. 20대 청년 A씨는 약 10년 전부터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다 2020년 9월 아버지가 뇌출혈 증세로 쓰러져 입원하게 된다. 불어난 병원비와 간병비 등 생활고와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해 4월 아버지를 퇴원시킨 후, 한동안 치료식, 물, 처방약 등의 제공을 중단하였고 결국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존속살해 혐의로 항소심에서 원심 유지의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며, 현재 국선변호사를 통해 대법원에 상고하고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중이다. 온 사회가 이 청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당신은 [이 청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라는 기사 제목처럼 돌봄을 받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비통함, 혼자 감당하기 버겁고 외로웠을 청년의 두려움에 대한 탄식, 그리고 패륜아로 불리게 된 아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씁쓸함 등이 해당 기사의 댓글로 줄이었다. 정치권 역시 이 비극에 관심을 보였다. 정치인들은 A씨의 국선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감형 청원에 가세하였고, 이 청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국가의 부실함을 개탄하며 복지사각지대를 해소해 가난의 대물림을 방지하자는 기조에서 국가가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청년 A씨의 비극이 아니더라도 돌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전담되던 돌봄을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20대 대통령 후보에 나선 각 진영의 후보들도 앞다퉈 돌봄을 국가적 화두로 공약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돌봄의 국가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돌봄국가책임제,’ ‘돌봄청,’ ‘5대 돌봄, 국가책임,’ ‘초등돌봄지원,’ 생태주의 ‘돌봄국가’ 등을 선보였다. 돌봄에 대한 이 같은 달라진 대우는 해방 이후 주요 국가 프로젝트에서 뒷전이었던 돌봄이 이제는 국가적 의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늦었지만 바람직한 가히 돌봄의 “백가쟁명 시대”가 왔다고 하겠다. 앞선 20대 청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대 청년의 안타까운 비극은 많은 정치인의 이구동성처럼 국가가 나서면 되는 문제인가? 정치인들이 구호하는 돌봄의 국가책임처럼 국가가 돌봄을 도맡는다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직전 선거까지 복지국가를 외치던 우리 사회는 이제 돌봄국가의 기치를 올리고 있다. 저마다 국가와 돌봄을 각양각색으로 접목하려는 돌봄 백가쟁명의 시대에 도대체 우리는 돌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좌표 삼아 과거의 돌봄을 반성하고, 현재의 돌봄을 구상하며, 정의로운 미래 돌봄의 제작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 이 책의 목적은 사회에서 억눌린 돌봄을 가시화하고, 이제껏 간과되어온 돌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돌봄이 배제된 부당한 사회구조를 함께 교정함으로써 더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앞당기기 위함이다. 이 목적에 부합한다면 이 책은 돌봄민주국가를 향한 패러다임 전환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돌봄민주국가란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국가이다. 돌봄을 개인과 사회에 필수적인 가치로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국가이다. 돌봄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단지 국가가 돌봄을 책임진다는 이해를 넘어 돌봄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이해가 필수적이다. 돌봄은 나와 우리, 사회를 위해 필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이를 보호하고 담당하며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누구도 이러한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누구도 이러한 책임에 무임승차할 수 없다는 전제가 돌봄민주국가의 근간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어느 엄마의 자식이듯,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돌봄에 힘입어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 속의 존재이다. 세상에 나와 성인이 되기까지, 성인이 되어서도 불의의 사고나 장애가 생기는 경우에도 그리고 나이가 들어 노쇠해지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모두는 돌봄을 받아야 한다. 어림잡아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삶의 시간대는 전체 인생의 4할에 육박한다. 누구도 돌봄을 외면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돌봄은 우리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가치이자 실천이고, 그래서 삶을 이어가는 목적이자 원동력이며, 인생사적으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삶의 안식처이다. 하지만 한국의 돌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청년 A씨의 간병살인 같이 극으로 치달은 경우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돌봄 일상 역시 불안하기 매한가지이다. 돌봄의 관점으로는 청년 A씨의 극단적인 삶도 우리의 불안한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돌봄이 초라한 사회에서 돌봄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개인의 책임으로 또는 특단으로 불리는 정책으로 일거에 해결되지 않는다. 혹은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돌봄국가책임제’ 같이 국가가 대신해서 아이를 키워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대신에 돌봄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이제껏 돌봄을 하찮게 여긴 사회구조의 변혁과 관련된다. 사회구조는 오랜 기간 켜켜이 쌓이고 굳어진 관습, 이데올로기적 태도, 적체된 제도 모두를 포함한다. 사회구조의 시정은 그러한 모순을 생성시킨 관습, 태도, 제도 모두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변화는 사회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집단적인 책임과 노력으로서만이 가능해질 수 있다. 얼마 전 퇴임한 한 교수가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한 돌봄체험담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돌봄경시풍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교수회의를 종종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교수회의에서 선배교수님들이 그냥 대놓고 하는 말이 ‘자네는 마누라도 없어?’ [였어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유명 대학의 남성교수라는 전문인이어도 돌봄을 하면 받게 되는 이러한 사회적 눈초리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아니 거의 대다수의 돌봄인들이 감내해왔던 사회적 무시와 서러움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두 돌 아이용으로 식당에서 비빔밥에 계란과 고추장을 빼달라고 주문했다가 ‘맘충’이라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아이를 집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조차 민폐인 것 같아 기가 죽는다. 물론 최근에 아빠들이 아이를 챙기는 달라진 풍경을 보면 전향적이지만 돌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지어 업신여기는 사회적 태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돌봄을 시장의 ‘그림자’로 여기고 돌봄인을 ‘투명인간’ 취급해 온 사회에서 돌봄을 받거나 돌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불안감과 불편함 그 이상이다. 이들 경험의 단편들을 모아 큰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돌봄이 배제된 사회구조 속에서 돌봄을 받거나 돌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다면적이고 체계화된 불평등이다.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정규직 직장을 그만두고 비정규 일용직만을 전전해야 하는 30대 아들, 지병이 많은 할머니를 홀로 두고 입대해야 하는 현민 씨, 어머니의 병환으로 돌봄을 도맡아야 하는 12세 희준 군, 양가의 치매 부모를 돌보느라 남은 인생을 지난 20년처럼 이렇게 다 보내야 하나 걱정이 앞서는 60대 부부, 경력과 육아를 놓을 수 없는 딸 부부의 육아전쟁을 대리하기 위해 월요일마다 지방에서 상경해 황혼육아에 참전하는 63세 할머니,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은 장애학생의 학부모들, 공기업 채용면접에서 ‘육아는 어쩔 거냐’는 질문을 받은 B씨, 육아휴직에서 돌아와 인사발령 등 “보이지 않는 아주 강한 압박”을 감당해야 했던 팀장, 고독사와 치매를 우려해 노인세입자를 기피하여 셋방을 구하기 힘든 혼자 사는 할아버지, 평생 돌보는 일에 매여 있는 자신의 삶을 애처로워 하며 손녀에게 ‘너는 결혼하지 말고 아이 낳지 마라’고 일생의 소회를 전수해주시는 필자의 이웃 할머니. 각자 사연이 있고 모두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삶은 돌봄을 받거나 돌봄을 할수록 일정하게 더욱더 불리해지는 모양새다. 청년 A씨 항소심 판결은 피고인이 “피해자가 죽을 때까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