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누구도 읽은 적이 없는 문학,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예술,
완전히 새로운 철학이 여기에 있다.
여기, 방 하나가 있다.
표지를 열면, 거기에 방이 하나 있다. 창문과 벽난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다. <여기>는 어디일까? 첫 페이지를 펼치자, 앞과 같은 방 안에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왼쪽 위에는 <2014>라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다음 페이지에도 <2014>. 다만, 소파는 흔적을 감추고 벽에는 새로운 책장과 이제 막 꽂힌 듯한 책들, 그 근처에는 책을 담아 두었던 종이 박스가 열려 있다. 누군가가 이제 막 이사를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를 열면, 방은 그대로이지만 시간은 반세기 이전인 <1957>년을 가리킨다. 살림살이와 벽지는 2014년에는 없었던 것들이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아기 침대와 소파 위의 분유통이 한 아이의 탄생을 알린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 가니 이번엔 <1942>년이다. 벽지가 다르다. 창문이 열린 방 안에는 사다리 하나뿐. 그다음 페이지인 <2007>년에는 펼쳐 놓은 소파베드가 보이고, 열어 둔 창문으로 <여기>에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를 보면, 다시 <1957>년으로 돌아온다. 드디어 사람이 등장해서 이 방 안에 왜 들어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첫 대사를 한다. 동시에 <1999>라고 표시된 작은 컷이 같은 화면의 오른쪽 페이지 아래에 보이고, 컷 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걷고 있다. 두 개의 시대가 두 개의 창을 통해서 두 페이지에 걸쳐서 그려진 셈이다. 또 페이지를 넘기면 <1623>년이고, 400년 전인 <여기>에서는 아직 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57년의 방 일부분과 1999년 방 한구석이 역시 시간을 넘어서 공존한다.
이렇듯 『여기서』는 같은 각도에서 본 똑같은 공간(여기)을 두 면에 펼쳐서 보여 주는 방식이다. 등장하는 시대는, 아직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기원전 30억 50만 년부터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22175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만 중심이 되는 20세기와 21세기, 특히 20세기 후반은 거의 매년 어느 정도의 형태를 갖춘 채 등장한다. 1907년에 지어진 이 집에 몇몇 가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며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놀고, 사랑을 받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지켜본다. 아마 책을 펼치고 어리둥절해진 독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여기>의 이런 방식과 매력에 빠져들게 될지 모른다. 읽는 방법은 자유다. 일어난 일들을 연대순으로 확인하거나, 역사를 재구축하여 읽거나, 그 시대를 반영한 패션이나 가구와 가전제품들의 변화에 주목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무렇게나 배열된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 여행의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
여기와 저기, 개인과 나라, 공간과 시간의 여행
리처드 맥과이어의 『여기서』는 1989년에 아트 슈피겔만이 만들었던 실험적인 만화 잡지 『로Raw』에서 처음 발표하였다. 하나의 방을 하나의 시점으로 그리고 무작위로 배열한 다양한 시대를 <여기>에 제시한 단편이었고 명확한 스토리도 없었다. 흑백으로 그린 6페이지, 총 36컷이 전부였던 이 단편이 당시 크리에이터들에게 끼진 영향은 『지미 코리건』의 저자 크리스 웨어의 에세이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원판을 조금 더 변형한 2000년판은 뉴욕에서 열렸던 예술가들의 전시 카탈로그에 게재되었고, 1889년판과 2014년 단행본판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컬러풀한 이미지와 수없이 겹쳐진 프레임 등을 통해 장르를 뛰어넘는 시도들을 선보였다. 드디어 2014년 발행한 장편 『여기서』는 발표하자마자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곧바로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2016년에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까지 수상하였다. 장편 『여기서』는 1989년판과 2000년판에서 살짝 보여 주었던 장대한 시간 여행을 300면 가까이 길게 담아내었다. 원색 화면들은 여전히 힘이 넘치며, 각 컷들은 동시에 배치되거나 수십 페이지 뒤에 다시 나타난다. 맥과이어는 직선적인 스토리가 아닌 마치 <음악처럼> 흘러가도록 의식했다고 밝혔다. 이 장편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각 화면을 구성할 사진 자료를 모으거나 일본의 팝아트 작가 요코오 타다노리의 작품과 만화가 프랭크 킹의 화면 분할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는 내용에서도 이전과 큰 변화가 있다. (어째서인지 미국이 배경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 개의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여기>는 맥과이어가 태어나서 자란 뉴저지의 퍼시 앰보이의 자기 집을 책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집에서 부모님과 누이가 죽었고, 작가 자신이 반세기 이상 살았다. 이 집을 무대로 도서관과 향토사가에게서 받은 퍼스 앰보이의 이미지와 자신의 가족사진을 자료로 사용하였고, 책에 담긴 거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으로 변형하였다. 작품 속 1957년에 태어난 아이는 당연히 맥과이어 자신이다. 부모님과 다섯 명의 형제들, 가족을 방문한 친척과 친구들도 재현되었다. 또한 몇 개의 대사와 에피소드는 맥과이어의 인생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들이. 예를 들어, 문화 인류학자가 <여기>의 뒤뜰을 보고 싶다고 찾아온 것은 실화이다. 작품 전편을 통틀어 첫 대사인 <여기에 왜 들어왔더라?>는 태어나서 자란 <여기>를 다시 찾아온 화자의 술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 맥과이어의 개인사만 들어 있지는 않다. 1984년에 등장한 <벤 프랭클린의 집>이라는 대사는 미국의 건국 설립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아닌 그의 서자 윌리엄 프랭클린의 실제 집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1624년 퍼스 앰보이를 처음 방문한 네덜란드 사람들과 원주민과의 만남도 기록하였다. 또한 『여기서』는 화면 안에서 다양한 위치로 각 시대의 이미지를 배열하였다. 서로 다른 시대를 각기 다르게 배열하거나 비슷한 행동과 대사들을 두 개의 화면에 여러 개 모아 놓기도 한다. 좀 더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비밀스러운 이미지의 반복도 놓칠 수 없다. 몇 개의 예를 들면, 17세기 숲에 나타났던 사슴이 2015년에는 머리만 박제되어 벽에 걸려 있다. 또한, 1959년에 등장한 남성이 외출하기 전에 확인했던 <손목시계, 지갑, 열쇠>는 2213년 미래의 관광객들에게 <20세기 아이템>으로 다시 소개된다. 1870년에 피크닉을 갔던 화가와 여성은 1930년에는 벽난로 위에 걸린 액자 속 그림으로 등장하고, 2015년 방의 주인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의 그림을 벽에 걸어 두었다. 그뿐 아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다가 쫓겨난 토지에서, 1930년에 살던 백인 아이는 인디언 추장 놀이를 한다. 『여기서』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바로 <프레임>이다. 각각 분할된 그림들은 모두 프레임으로 감싸거나, 많게는 20여 개의 프레임이 한 화면에서 같이 등장한다. 게다가 방 안의 창, 거울, TV, 컴퓨터, 액자 등도 모두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의 그림에도 역시나 <창>이 있다.) 이렇게 <화면 안의 화면>은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은 다양한 스크린과 멀티 윈도우를 연상시킨다. 그런 의미로, 맥과이어는 종이책과 동시에, 좀 더 인터랙티브한 매체인 전자 서적판도 함께 발표하였다. 작가는 먼 훗날 미래에는 독자가 <여기>에 들어가서 각 페이지를 읽는 비주얼 리얼리티판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였다. 저자든 독자든 『여기서』의 가능성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