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 상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3부작
「부서진 대지」 시리즈 제2편
세계 최고 권위의 SF 문학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으로 수상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오벨리스크의 문』이 출간되었다. 2016년, 『다섯 번째 계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N. K. 제미신은 다음 두 해까지 연이어 수상에 성공하는 최초의 기록을 달성하였다. 지질학적 개념을 차용한 독특한 세계관과 설정을 바탕으로 한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강력한 능력을 지녔지만 사회적으로 핍박당하는 종족인 ‘오로진’의 여성이 펼치는 모험과 투쟁 속에 인종 차별과 문화적 충돌이란 주제를 정교하게 담아 내며 독자와 평단의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2019년, 제미신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매년 발표하는 100인의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다섯 번째 계절』은 《가디언》이 선정한 21세기 도서 100선과 미국 문학 웹진 릿허브(Lithub)의 2010년대 베스트 소설 목록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다섯 번째 계절』의 충격적인 결말로부터 바로 이어지는 『오벨리스크의 문』은 ‘후속작은 전작의 재미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통념을 깨며 작중 등장하는 미지의 존재인 스톤이터와 오벨리스크, 고요 대륙 사이의 숨겨진 진실을 서서히 드러낸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권은 2020년 국내 출간 예정이다.
드러나는 스톤이터와 오벨리스크의 실체,
그리고 각자의 숙명에 이르는 모녀의 여정
지진 활동과 관련된 에너지를 다루는 능력이 있지만 오히려 그 힘 때문에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존재, ‘오로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던 여성 에쑨은 아들을 살해하고 딸을 납치하여 사라진 남편 지자를 쫓아 대륙을 헤매던 중 ‘카스트리마’라는 지하 도시에 다다른다. 놀랍게도 카스트리마는 오로진이 마음껏 정체를 드러내고 지낼 수 있는 곳이었으며, 이카라는 오로진 여성이 도시를 이끌고 있었다. 이곳에서 옛 동료이자 스승 그리고 연인이었던 알라배스터와 10여 년 만에 조우한 에쑨은 그가 고요 대륙에 재난을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직 딸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만이 있었지만, 이제는 대륙의 흥망과 연결된 알라배스터의 원념, 그리고 새로운 정착지 카스트리마의 복잡한 상황에 당면해야 한다.
한편 이야기의 절반은 에쑨의 딸인 나쑨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지자는 자신의 손으로 때려 죽인 아들에 이어 딸 나쑨까지 오로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로진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소문을 따라서 대륙의 남쪽으로 향한다. 나쑨은 어머니보다 자상했던 아버지가 오로진을 향해 때때로 드러내는 혐오로 인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지만, 이윽고 도달한 오로진들의 공동체에서 자신에게 잠재된 거대한 힘을 발견하고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SF?판타지의 새로운 황금기를 여는 작가, N. K. 제미신
SF는 오랜 기간 (주로) 백인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201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N. K. 제미신이 명망 높은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3년 연속으로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이러한 지평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2019년 《포린 폴리시》의 ‘세계의 사상가(Global Thinkers)’ 소개글 중에서
N. K. 제미신은 데뷔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서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작가’이자, ‘3년 연속으로 수상한 최초의 작가’란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그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2000년대 중반에 쓴 첫 장편 원고인 『킬링 문』은 고대 이집트를 연상시키는 배경 하에 유색인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작품으로, 에이전시의 눈에 띈 이후에 뉴욕의 여러 출판사에 보내졌지만 상업적인 이유로 전부 거절당했다. 본질적으로는 주류의 정체성과 동떨어진 작가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느낀 제미신은 한때 트렌드에 따른 작품을 써 볼까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뚝심 있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집필을 계속해 나갔고, 결국 프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점차 다양성을 추구해 가는 장르소설계의 흐름에 반발하는 ‘새드 퍼피’ 운동이 문제시되어 휴고 상이 홍역을 치른 이듬해 수상한 제미신의 성과를 실력 덕이 아니라 흑인 여성이어서라고 폄하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편뿐 아니라 단편, 중편, 시리즈 등 대부분의 분야를 여성 작가들이 휩쓴 2018년 휴고 상 시상식에서 제미신은 자신이 상을 받는 이유는 이전의 모든 장편상 수상자와 마찬가지로 노력 때문이라고 소감을 밝히며 반대자들에게 통렬한 한 방을 날렸다. 앞으로 제미신이 보일 활동과 그녀의 업적으로 달라질 SF?판타지 계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