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상 교수(한국방송대 교수, 문학평론가)가 시인 ‘정지용’에 대한 학술연구서를 출판하였다.
저자는 그 동안 충북 옥천의 지역축제인 <지용제>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축제인 ‘지용제’가 우리나라 지역축제의 선두에 서서 견인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지용제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지용문학포럼’에서 줄기차게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함으로써 지용에 대한 학술연구가 진일보 발전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제23회 지용제(2010. 5. 15)를 추진하면서 저자는 정지용문학에 대한 연구서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지용제’는 단순히 문학제에 머물지 않고 충북 옥천을 기반으로 하는 성공한 지역축제라는 데에서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충북 옥천의 지용제는 바로 ‘문화’를 브랜드로 하여 지역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취한, 독특한 방식을 선택했다.
지용제의 또 하나의 묘미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문학포럼’을 지속시키고 있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딱딱한 축제라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지만, 고집스럽게 초기부터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용의 실험정신’을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를 했으며, 그 결과 많은 새로운 성과들이 나왔다.
저자의 <정지용의 삶과 문학>은 지용문학포럼에서 그 동안 발표했던 논문들과 새롭게 집필한 논문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1부 정지용은 왜 불안했는가에는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과 '문장에 발표한 정지용 ‘한적시'의 특성'이 수록되었고, 제2부 정지용은 무엇을 지향했는가에는 '정지용과 ‘문장파 근대미술가들’'과 '한국문화사의 관점에서 본 정지용'이 실렸다. 제3부 정지용은 왜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했는가에는 '문장과 정지용'이 수록되었고, 제4부 북한에서 정지용은 부활했는가에서는 '북한문학사에서의 정지용'이 실렸다.
이 연구서에서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의 소위 식민지 현실 속에서 암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고독을 느끼면서도 시를 지속적으로 씀으로써 전통의 단절을 끝까지 피하려고 한 공적을 높이 평가해야만 하며, 정지용의 이 시기의 소극적인 저항방법으로서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과 은일자적 정신태도가 잘 드러나는 시편들에서 그가 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잡지 <문장>을 통해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도 잡지 <문장>의 가치가 새롭게 매겨질 수 있다. 이번 연구서에서 특히 <문장>에 대한 탐구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에 와서 정지용이 ‘현대시의 아버지’로 떠받들어 지는 이유는 그가 추구한 미적 특성이 자본주의가 낳은 변종 문명들을 아이러니와 위트의 방법으로 비판한 해학미에서부터 종교적 성찰인 숭고미를 거쳐, 결핍과 상실의 비극미와 우아미의 예술적 미적 세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미적 범주는 많이 좁혀졌지만, 그러한 것들이 청록파 시인들인 박목월에서는 비극미를 토대로 한 ‘우아미’의 세계로, 조지훈에게서는 ‘비극미와 우아미’의 혼성의 미적 세계로, 그리고 박두진에서는 ‘숭고미와 우아미’의 삼투적 혼성물로 채색된 것은 한국문학사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북한문학사에서 정지용은 완전히 복권되고 부활했는가? 정지용이 온전하게 대중들에게 부활하게 된 것은 작곡가 김희갑과 가수 이동원 그리고 서울대 음대 교수 박인수 때문이었다. 1991년 그들이 작곡하고 부른 <향수>가 공전의 히트를 하여 막 해금된 정지용 시인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북한문학사에서 정지용 시인은 부르주아 잔재의 반동작가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전혀 거론이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향수>라는 대중가요가 크게 성공해서 그런지 1994년을 기점으로 북한문학사에서도 정지용 문학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이루어져 그의 문학이 부활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21세기 들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갑을 맞이하여 북한에서 펴낸 30권으로 된 <조선대백과사전>에 정지용 시인의 이름이 당당하게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의 정지용에 대한 북한 문학사가들의 평가에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정지용의 초기시의 경향을 향토와 자연을 대상으로 한 민요풍의 작품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1920년대 후부터 1930년대 초의 모더니즘적 경향을 ‘형식주의적 경향’이라고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8?15 후의 임화 주도의 조선문학가동맹에 이름만 올려놓은 정지용 시인의 활동을 남조선에서 진보적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1930년 말부터의 <문장> 편집인으로서의 활동상과 1941년에 간행된 그의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 실린 산시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지용의 후기시에 대한 침묵은 북한평론가들의 자료부족에 따른 무지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시기의 창작활동의 성과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용시에 대한 <조선대백과사전>의 평가는 1994년 이후 수록된 <조선문학사 2>에서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를 서술하면서 <조선문학사>의 권9는 그동안 부르주아 반동문학으로 취급하여 북한문학사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정지용 문학에 대한 대부활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책에서 정지용 문학은 총 4쪽에 걸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1920년대 중엽에 시단에 등장한 그는 1941년 시집 <백록담>을 낼 때까지 시를 썼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시창작은 대체로 1930년을 전후하여 일련의 변화를 보여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시문학의 진보성과 민족성을 두고 말할 때 다분히 1920년대에 창작된 그의 시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의 초기 시들은 짙은 향토색 및 민족적 정서와 민요풍의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고 호평하였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고향?, ?그리워? 등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의 시는 일제식민지 통치의 어두운 상황에서 씌워졌지만 마치도 가을날 산골짜기에 서리는 찡한 정기랄가, 봄날 산야를 엷게 물들이는 잔디의 움돋음이랄가 어딘가 모르게 생신한 감각, 청신한 호흡, 가락 맞는 박동이 뚜렷이 살아있어 민족정기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고 정지용 문학에 나타나는 민족성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시인 정지용은 그의 시적 예술성에 대해 남북문학사가 동시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시인이다. 앞으로의 문화적 교류의 진전과 남북 문학사가들이 통일문학사에 대한 공동 집필을 통해 거리를 좁혀주는 성과물이 나오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또한 박태상의 <정지용의 삶과 문학>은 ‘잡지 <문장>의 편집진이었던 시인 정지용과 서양화가 김용준 사이의 미적인 동질성 입증을 통해 ‘학제 간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도 큰 성과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