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설이 나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말하게 될까봐
말할 기회가 영영 없을까봐 초조했다.” _황정은(소설가)
아름답고 광포하고 쓸쓸한 소용돌이로 휘몰아치는
최은미 소설세계의 눈부신 분기점
2021 현대문학상 수상작 「여기 우리 마주」,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 「눈으로 만든 사람」 수록
정제된 문장을 차분히 쌓아올려 단숨에 폭발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가 최은미가 자신의 작품세계에 눈부신 분기점이 될 세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을 선보인다. “이후의 한국문학을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라는 평과 함께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여기 우리 마주」와 젊은작가상 수상과 더불어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발표 당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눈으로 만든 사람」을 비롯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쓰인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 『아홉번째 파도』를 통해 끊임없는 문학적 확장을 이루어낸 작가가 마침내 ‘최은미 스타일’이라고 부를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결과물이다.
앞선 작품들이 이미 결정된 세계에 놓인 인물을 통해 벗어날 길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억압의 정념을 그려냈다면, 십대 소녀부터 유자녀 기혼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번 소설집은 우리가 이들에 대해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멀리 비켜남으로써 무엇도 고정되지 않았기에 어디로도 갈 수 있는 해방의 파토스를 이끌어낸다. 참고 견디며 인내하던 최은미의 인물들은 이번 소설집에 이르러 터뜨리고 외치며 달려나간다. 하지만 이는 감정을 빠르고 뜨겁게 분출하기보다는 얼음 결정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깎아나감으로써 마치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한 컵 속 물처럼 아슬아슬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어코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려 모든 것을 터뜨릴 때, 최은미 소설의 인장인 서늘한 파괴력이 뿜어져나온다. “일어났다 사라지고, 솟아났다 흩어지고, 눌리고, 찌그러지고, 터져나와 천장에 파편처럼 박혀버린 모든 감정, 말들, 욕과 사랑, 애원과 멸시, 체념, 기대, 자책과 비명”(「보내는 이」, 19쪽)을 끄집어내어 우리 안에서 휘몰아치는 아름답고 광포하고 쓸쓸한 소용돌이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 『눈으로 만든 사람』은 그 소용돌이에 새겨진 독창적인 무늬로 빛나는, 2020년대 한국문학을 이야기할 때 첫머리에 놓이게 될 작품집이다.
팽팽한 추위와 옅은 빛으로 가득한 계절의 한가운데서
깎이고 덧대어지고 다시 쌓아올리며 지금의 내가 된다는 것
『눈으로 만든 사람』은 크게 여성 인물이 가족과의 관계에서 겪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과 여성 인물이 가족 바깥의 인물과 맺는 특별한 관계에 집중하는 소설로 나눌 수 있다. 「눈으로 만든 사람」 「美山」 「11월행」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운내」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눈으로 만든 사람」은 이번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처음에 쓰인 것으로, 이후 최은미의 소설세계가 뻗어나갈 여러 갈래의 방향을 가리켜 보인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강윤희’에게 어느 날 작은아버지인 ‘강중식’이 아들 ‘강민서’를 잠시 보살펴달라고 부탁해오며 시작된다. 어릴 때 소아림프종 진단을 받았던 강민서는 항암 치료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최근 암이 재발한 상태다. 강윤희는 강민서와 함께 지내는 동안 중학생답지 않게 세심하고 다정한 그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강민서는 강윤희가 잊고 싶어한, 그러나 떨쳐낼 수 없는 강중식과의 오래전 기억을 상기시킨다. 강중식은 강윤희가 어렸을 때 그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와 내담자」 속 ‘강수영’과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유정’의 이야기에 간섭하며 세 작품을 일종의 연작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세 작품 모두 인물을 휩쓸고 지나간 사건의 폭력적인 면을 그리는 데 열중하기보다는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인물의 모습을 세심하게 다룬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강민서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 강윤희가 눈사람이 다 녹아 흘러내린 뒤에도 “눈사람, 없어진 거 아니야. 그냥 모습이 변한 거야”(128쪽)라고 했듯이, 「나와 내담자」에서도 작가는 상담 기간이 끝나고 더이상 찾아오지 않는 강수영을 기다리는 상담자 ‘나’의 모습으로 소설을 마무리함으로써 이 기다림에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유정도 사정은 비슷하다. 소설가인 유정은 오래전 미산이라는 마을에 살며 가깝게 지냈던 ‘창용이 오빠’의 연락을 받고 동생 ‘유태’와 함께 내린천휴게소로 향한다. 내린천휴게소 아래 있는 그 마을은 어린 시절 유정이 겪은 상처가 고스란히 파묻혀 있어 언제라도 유정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곳이다. 소설은 유정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손쉬운 공감을 차단하면서도, 유정이 창용이 오빠의 아내이자 베트남 이주 여성인 ‘디엔’과 만나고 상처의 기원인 미산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유정이 고통을 ‘통과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내게 내가 나일 그때, 246쪽)가 인물들로 하여금 “그때로 시간을 되감고 또 되감는 것을 멈출 수”(「운내」, 158쪽) 없도록 만드는 일은 이번 소설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열세 살 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운내라는 곳에 보내진 ‘나’가 그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여자아이 ‘승미’와 보낸 한 시절을 그린 「운내」와, ‘나’가 어린 시절 잠자리를 잡던 순간과 동생을 잃던 순간을 포개놓음으로써 무언가가 찢어지고 분질러지고 쪼개지던 그때의 감각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美山」은 소중한 무언가를 과거에 “영영 두고 올 것을 알지 못한 채”(「11월행」, 279쪽) 그 시기를 지나온 이야기로, 끈적이고 축축하며 불가해한 채로 남아 있는 그 시절에 상실로 인한 슬픔의 색채를 덧칠한다.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그리고 그 상실은 타인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잃는 감각과도 연결된다. 소설집 서두에 나란히 배치된 「보내는 이」와 「여기 우리 마주」는 유자녀 기혼 여성이 가족과 사회 안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압도적인 디테일로 표현해냄으로써 ‘나’로 서 있기 위한 여성들의 고투와 그들이 서로를 마주했을 때 터져나오는 격렬하면서 낯선 생동감을 담아낸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급격히 달라진 삶을 그려낸 「여기 우리 마주」에서 ‘나’는 구 년간의 홈 공방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상가에 공방을 연 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나’는 일과 육아,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고독감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낸다. 이는 아이를 키우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수미’ 또한 마찬가지다. 일과 육아 모두에서 강박에 가까운 부담을 느끼는 이들 유자녀 기혼 여성의 삶은 코로나19의 확산과 더불어 위기를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보내는 이」의 ‘나’와 ‘진아씨’ 또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열한 살의 여자아이를 키운다는 공통점으로 서로 가까워진다. 짧지 않은 시간 함께해온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러나 어느 순간 진아씨를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지며 변화를 맞고, ‘나’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아씨에게 말을 걸기 어려워진다. 그런 와중에 강력한 태풍이 북상한 주말, ‘나’는 남편이 집에 오는 주말이면 늘 완강히 내려져 있던 진아씨네 거실 블라인드가 그날따라 걷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