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20세기 문학적 표현의 혁신을 가져온 미국의 대표 시인 “나의 심장이 당신과 함께한 지 오래도 되었지요”. 1959년 4월 10일 브린모어대학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서 커밍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벽까지 가득 들어찬 젊은 여성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이 비단 이런 연애시에만 열광한 게 아니라 정치인과 장군들을 풍자하는 시들도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커밍스는 언뜻 보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정성과 풍자라는 두 가지 특징을 모두 지닌 독특한 시 세계를 선보인 인물이었다. E. E. 커밍스는 시인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다. 언제나 연필이나 붓으로 하는 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보스턴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입체파를 접하고, 졸업 후에는 프랑스에서 아방가르드에 닿으면서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개발하는 데 자극을 받았다. 특수한 효과를 위해 타이포그래피나 구두점들을 가지고 놀 뿐만 아니라 공간적 배열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들을 창작하며 자신의 시에 시각적 지향성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듯 문학 세계에서 언어를 확 비틀어 파편적 표현 방식, 거친 병치, 문법적 왜곡, 놀랍도록 선명한 이미지들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커밍스는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와 함께 20세기 문학적 표현의 혁신을 가져온 미국의 대표 시인이라는 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독특한 형식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보편적 심상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전위성만이 커밍스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심장이 어둠이어서 입을 열지 않는 사람들,/ 작은 순수가 그들을 노래하게 만든다;/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 (...) / 작은 순수가 하루를 창조한다”처럼 순수에의 지향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는 시 구절을 보면 그가 영미시의 전통 속에서 이어져 온 보편적 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독특한 형식 속에서 펼쳐지는 순수, 자연, 사랑, 인간, 풍자 등에 관한 시들은 다양한 정서를 표방한다. 「맹렬한 간결함 속으로」에서처럼 삶이 가져오는 것이라면 즐거이 수용하겠다는 젊은 활기, 「그녀의 키스의 더러운 색깔이 방금」에서처럼 섹스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 연인의 사랑이 있다면 고통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감정을 묘사한 「연인이여」, 「이 분주한 괴물을 불쌍히 여기지,비인간종이여,」의 인간 혐오적인 행들, 그리고 마침내 「수선화의 시간에는」에서의 고요에 이르기까지 커밍스의 시 세계는 다채로운 와중에 서로 상반된 요소를 통해 양가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시의 소음을 대비시켜 이 둘 사이의 긴장감을 그려 내는 동시에 독자에게 두 세계의 미묘한 조화를 느끼게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혐오의 감정이라는 탐구는 한편으로는 깊은 애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냉소적 시각을 보여 주며 시를 더욱 풍부하고 다층적으로 만들어 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자가 그의 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통찰을 얻는 이유다. 번역의 불가능성을 딛고 커밍스 읽기의 하나의 독법을 제시하다 이번 선집을 번역한 현대 영미시 전공자인 박선아 교수는 “커밍스의 시를 오늘날 다시 읽는 일은 단순히 문학적 실험을 넘어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모순을 포착하기에, 즉 실험적 형식을 통해 전통적 시의 구조를 해체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감정과 인간적 이야기를 담아내려 했기에 그 의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언어를 다루는 그의 독특한 방식 때문에, 그리고 형식이 곧 의미화임을 함의하는 커밍스의 실험성 짙은 시들 때문에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의 논문에서는 시 번역을 배제하는 경우도 간혹 있어 왔다. 이 책의 옮긴이는 “더러는 길을 잃을 것이고, 더러는 시인의 의도에 꼭 들어맞는 읽기가 되겠으나 본 번역서의 역할이 하나의 독법을 제시”하기를 바란다고 밝히며 “이 같은 번역 불가능성을 딛고 독자들에게 최대한 그 의미와 실험성을 잘 전달하고자” 하는 데 이번 번역의 주안점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본서는 옮긴이의 이러한 바람과 의도를 충실히 담아내고자 원문을 함께 싣고, 고딕체와 드러냄표 등을 활용해 원문에서 영문법상 대문자로 처리되는 부분이 소문자로 처리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한글에서도 비슷하게 구현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