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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한 군사정권 시대에도 영화들이 있었다
“민주화의 열기를 품은 ‘서울의 봄’은 5월 광주 시민들이 신군부에 학살당하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즈음부터 우민화 정책이 속속 등장했다. 신군부 세력은 유신정권이 사치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막아 오던 컬러TV의 시판을 1980년 8월부터 전격 허용했고, 12월 KBS를 시작으로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정권 홍보에 TV를 이용했음은 당시 ‘땡전 뉴스’라는 말이 회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종화,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도>, 96쪽
80년대 한국사회, 한국영화
《21세기 한국영화》-《1990년대 한국영화》를 잇는 한국영상자료원(KOFA)의 한국영화사 시리즈 제3탄.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총성으로 시작해 <영웅본색> 주윤발의 대사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구나”로 끝나는 ‘Memoir’를 필두로 각 필자의 원고와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하는 지면까지, 마치 입체 퍼즐처럼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전체상을 그려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1980년 신기루처럼 사라진 ‘서울의 봄’부터 정권 홍보 목적이 앞섰던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한국사회는 군부정권의 엄혹한 시대를 겪으며 세계화의 거센 흐름에 노출되었지만, 그 저류에는 대중의 생생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낯 뜨거운 에로영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었지만 외국영화에 맞춰진 대중의 눈길을 돌리고자 영화계가 합심해 여러 장르를 모색했던 시기, 기성의 작가주의 감독들은 자신만의 미학을 굳히기 위해 우회와 나아감을 되풀이했으며,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신진 감독들은 우리 영화미학이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공공 필름 아카이브인 한국영상자료원만의 장점을 발휘해 다소 전문적인 내용일 수 있지만 대중 독자들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도서 시리즈를 기획해 온 “한국영상자료원만이 낼 수 있는 한국영화사 책”이라는 한국영화 시리즈의 기획 의도에 가장 근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애마’부터 ‘달마’까지 코리안 뉴웨이브의 출발
흔히 1980년대 한국영화는 ‘촌스럽다’거나 ‘저질이다’, ‘에로영화밖에 없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영화는 언제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80년대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지나친 진지함과 우울, 폭력성은 당시 영화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들과 맞닿아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가로막는 독재권력의 감시 속에 충무로의 기획 제작 관행이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젊은 감독들의 새롭고 활기찬 재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한국영화는 여전히 외화수입권을 따기 위한 구색 맞추기용 생산물의 성격이 강했고, 많은 영화들이 프로덕션의 낙후성과 부실한 완성도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애마’부터 ‘달마’까지 에로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존하고, 이장호 · 배창호 · 박광수 · 장선우 · 이명세 등 새로운 영화운동 정신이 기존 충무로 시스템과 결합한 ‘코리안 뉴웨이브’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영화를 넘어선 80년대 문화 지형도
“옛날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스포츠에만 열광하고 영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영화감독은 자살을 결심하였습니다.” _ <바보선언>(이장호, 1983)
이 책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보다 더 좋은 시작은 없다고 말한다. 바람불어 좋은날, 바보선언, 과부춤, 무릎과 무릎사이, 어우동, 이장호의 외인구단,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그다음은 배창호이다. 꼬방동네 사람들, 적도의 꽃, 고래사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깊고 푸른 밤,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그리고 60년대부터 영화를 찍어 온 임권택은 80년대부터 꽃을 피웠다. 만다라, 안개 마을, 길소뜸,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리고 1983년 출간된 책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를 꼽는다. 제3세계 영화의 등장, 종속이론, <전함 포템킨> 복제 비디오,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 80년대를 주름잡은 홍콩영화 <영웅본색>은 박스오피스가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떴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밖에도 80년대 대학 풍경과 영화청년들, 전두환의 3S 우민화 정책, 초보적 시네마테크, 애마·산딸기·뽕·변강쇠 등 에로물 홍수, 지금은 잊힌 신파물, 인신매매와 사회물, 80년대 신트로이카, UIP 직배 <위험한 정사>, 뱀 소동, 베를린장벽 붕괴... 대부분은 구경꾼이었고 당사자는 소수였던 그런 시대, 영화 위에 무엇을 올릴지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에 각자 다른 대답을 내놓았던, 어쩌면 현재진행형일지 모를 그런 시절을 영화를 매개로 들여다본다.
그때 그 시절 극장 풍경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정책적・산업적 환경과 작품・영화인 등을 개괄하는 이 책의 1부는 정성일・이효인의 1980년대 한국사회와 영화에 대한 회고록을 담고 있으며, 2부는 정종화(총론)・허남웅(장르)・김영진(미학)・김혜선(배우)・유운성(독립영화)・공영민(영화문화)이 참여하였고, 영화인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한 3부는 이수연이 담당하였다. 3부의 영화인 인터뷰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영상료원에서 진행한 ‘영화인 구술채록 사업’을 통해 수집된 구술 자료에서 발췌한 것으로, 지난 20년간 총 227명의 영화인들이 남긴 1,230시간의 인터뷰 중 이 책에는 1980년대 한국영화산업에 대해 30명의 영화인들이 남긴 기록을 활용하였다. ‘서울의 봄’으로 시작된 80년대 한국의 정치적 · 사회적· 문화적 지형과 영화 장르, 영화문화와 독립영화, 작가주의와 배우 분석 외에도 1980년대 청춘남녀의 발길을 이끈 전국 29개 ‘극장 풍경’과 1980년대에 활동한 다양한 영화인들의 증언으로 구성한 ‘구술로 보는 1980년 한국영화’, ‘1980년대 영화산업 주요 통계’ 등을 부록으로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