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침묵만이 상연되는 무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튜토리얼 2018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기원석의 시집 『가장낭독회』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그가 시를 쓴 지 6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4부 구성으로 총 42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기원석 시인의 시는 마치 연극 공연에서 무대 배경이나 장치를 수시로 바꾸듯 다채로운 시적 정황을 펼쳐두고 독자들을 초대하는데, 정작 초대장을 받은 독자들이 관객으로 들어서면 무대는 암전되어 어두워지고 그대로 공연이 시작된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도 소외되거나 종종 무대에 끌려가 배우와 교환된다. 이러한 화자들은 시에서 설계된 그로테스크한 상황에 감화되지 못한 채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객석을 향해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은 거의 “시가 되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튜토리얼」)어서 소통은 단절되고, 혼재되는 언어의 혼란 속에서 독백이나 방백 처리되며, 차라리 자신을 “침묵 속에서 다시 읽어주”(「마지막 시」)라고 권유한다. 말하자면 백지라는 무대는 시인이 시를 쓰는 순간 암전되어 온통 암흑으로 뒤덮이고, 우글거리는 문장들은 의미가 전달되는 대상 없이 부유하여 먼지 속에서 떠돌면서 침묵을 상연하는 것이다. 기원석이 말하는 침묵은 말하기를 포기하거나 말하는 도중에 입을 다무는 정도가 아니라 거듭하여 말하기를 반복하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와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해 스스로 말을 창살에 가두어버리는 행위로 확장된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삶은 모두 일종의 게임 속 ‘튜토리얼’을 반복하는 형태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튜토리얼은 반복을 직조”(부록 「제목을 입력해주세요」)한다는 시인의 말처럼, 삶의 주인은 좀처럼 내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세계의 매뉴얼을 익히는 데에만 온 힘을 다 쓰게 된다. 시집은 튜토리얼이라는 같은 제목의 시를 여섯 번 반복하여 수행한다. “그러나 다음에 읽을 시는 너를 절망하게”(「튜토리얼」) 하고, “기원석은 본편에 영영 진입하지 못한 채” “다시 튜토리얼에 앞에 서 있”고(「튜토리얼」), “지루하겠지만 잘 있어 보”(「튜토리얼」)라고 말한다. 삶은 이미 정해진 세계의 법칙과 구획을 바탕에 두고 말과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조작법을 익히는 연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튜토리얼만 반복되는 세계에서 시를 쓰며 나 자신을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만이라도 원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무대 밖으로 뛰쳐나온다”(「과묵한 이발사」)고 할지라도 시인만은 무대에 ‘이야기꾼’으로 홀로 남아 이야기를 마저 한다. R 버튼과 X 버튼 사이에 앉아 박수갈채를 받는 수감자 “간격 없는 반복”(「CONFIDENTIAL」)으로 시를 건너오면 4부 첫 시로 「마지막 시」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시인은 두 가지 버튼을 준비한다. R 버튼과 X 버튼, 그것들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키 설정”(「막」)을 잘못하면 삶이 곤란해질 수가 있다. 화자도 독자도 마지막 문장에 도달하면 R 버튼을 눌러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X 버튼을 눌러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삶을 애초에 배우와 관객만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각자의 의미대로 펼치고 있는 이 “공연은 한 번 퇴장한 뒤 재입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버그”에 걸렸지만 수없는 튜토리얼을 진행해도 삶은 원하는 대로 구성되지 않는다.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무대는 아무리 혼신의 연기와 대사를 펼치더라도 죽은 영혼이 떠도는 구천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 투명한 창살에 가둬진 듯한 기분은 곧 삶을 실재하는 감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쓴 시집의 독자일 뿐, 그 밖의 다른 영향력은 펼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공연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어떤 내용이 끊임없이 삭제되다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묻는다. “진짜 삶이 우리를 죄다 비우기 전에” 내용을 삭제하겠느냐고. 하지만 이미 내용은 삭제되는 중이고 질문은 괄호에 갇혀 그마저도 삭제된다. 시를 쓰는 모든 시인은 감옥에 갇힌 수감자다. 빛보다는 어둠에 더 감응하며 시에 자신을 비추는 내용을 적는다. 기원석은 “너를 움켜쥐는 어둠”을 “나의 내용”(「암시집」)이라고 말한다. 시의 투쟁이란 바로 “박수갈채”가 전부 “음향 효과”임을 알면서도 무대 위에서 자신의 시를 끝까지 낭독하는 일일 것이다. 시에서는 누구나 얼굴과 몸과 태도를 거짓으로 가장(假裝)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어김없이 낭독회를 꾸려 독자들을 초대할 것이다. 이 무대를 시작하려면 우선 빈 의자들부터 깔고 아무도 오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