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썸타기, 본격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되다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 같다. 과연 이런 가벼운 유행어들이 진지한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어쩌다 철학책의 소재가 된다더라도, 농담 섞인 대중서가 아닌 심도 깊은 학술서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까? 이 책은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젊은 세대의 연애 문화는 철학적으로 탐구하기에 충분히 가치 있고 중요한 주제다. 더군다나 그 연애 문화가, ‘썸타기’처럼 이전에는 두드러지지 않던 현상을 동반한다면 말이다. 한 사회의 연애 문화는 그 사회와 긴밀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점에서 ‘썸타기’라는 신조어는 한국 사회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암시한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서로 만나고 끌리고 마음을 나눈다는, 인생의 중대사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고, 그 태도가 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썸타기’와 ‘어장관리’라는 언어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성호 교수는 더없이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 신조어들에 대한 치밀한 개념 분석과 명료한 논증을 통해, 이 시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내놓는다. 그리고 어쩌다 이 시대에 자신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MZ세대의 내면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세심한 이해에 도달한다. “근데… 우리 무슨 사이야?” 영화〈건축학개론〉은 개봉 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주인공들의 관계, 그리고 주인공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영화다. 정말 그들은 썸을 탄 것일까? 아니, 당장 지금 나와 내 ‘썸남/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 자신의 생활에서든, 대중매체에서든 썸타기를 경험하거나 목격한 이들이라면, 썸타기가 불확실한 관계라는 데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불확실함의 정체가 뭘까? 썸타기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그 본성을 밝히기 위해 최성호 교수는 우선 이 불확실함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썸타기의 불확실성이 상대방의 마음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인식적 불확실성’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대신 ‘의지적 불확정성’을 제안한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프랭크퍼트의 ‘의지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 개념은 상대방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한 자아로 수용해야 할지, ‘탈법적 침입자’로 간주하고 자아에서 추방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함에서 오는 불확실성이다. 즉 상대방의 마음이 불확실한 문제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불확실하다는 문제가 썸타는 관계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썸타기가 연애로, 사랑으로 발전하려면 자신의 의지를 확정하는 결심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자아에 대한 명징한 이해가 필요하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인간이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의존한다”는 최성호 교수의 통찰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 중 하나로, 썸타는 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신의 내면을 살피게 한다. 탈진리 시대, 그래서 우리는 썸을 탄다 요컨대 썸타기 현상이 만연하다는 것은 의지적 불확정성의 단계에서 서성거리는 젊은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다. 왜 이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의지적 불확정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최성호 교수는 ‘썸타기’ 현상의 대두에 대한 시대적 배경으로 2010년대 이후의 탈진리(post-truth) 시대의 발흥을 지목한다.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시대, 모든 주장이 상대화되고 개인들의 세계가 각자 파편화되어 참과 거짓의 구분마저 의미를 잃어가는 시대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가” 등에 자아관을 견고히 할 근원적 질문에 대해서도 참조할 만한 모범답안을 찾을 수 없는 회의주의 전성시대의 우리 젊은이들은 사랑에 관해서조차 자신의 자아가 어떤 의지와 욕구로 채워져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이처럼 최성호 교수는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가 놓인 현주소를 짚어내고, 이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개인들의 내면을 재발견하기에 이른다. 최성호 교수가 최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분석철학 특유의 논증은 밀도 높고 정교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명료하게 쓰여 있어, 독자가 찬찬히 따라간다면 흥미로운 지적 여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철학적 여정을 마치고서는 모처럼 사회와 삶, 사랑, 자아에 대해 곰곰이 성찰해보게 될 수도 있겠다. 여느 ‘멘토링’ 서적처럼 강요하지 않고도,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읽는 이에게 성장의 계기를 가만히 건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