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회학자 김홍중의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위한 단상 『마음의 사회학』과 『사회학적 파상력』으로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회학의 시선으로 섬세히 들여다보며 그 풍경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 김홍중의 첫 산문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그의 책들이 주로 학술적 글쓰기와 논리정연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이번 책은 문학적인 단상 형식으로 생각을 자유로이 풀어내어 한결 편히 읽을 수 있다. 한때 시인이기도 했던 저자의 생동감 있는 문체가 좀더 잘 드러났다. ‘단상’은 널리 쓰이는 글쓰기의 방법이지만, 막상 그중에 적절한 무게감을 갖춘 동시에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글은 쉬이 찾기 힘들다. 그것은 단상이 자유로운 방식의 글쓰기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독특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의 글쓰기 방식과 묘하게 닮았다. 짧고 끊김이 많은 글,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 충분히 기능하며 활짝 열려 있는 글. 동시에 널리 퍼지기 쉬운 글. 『은둔기계』는 부러 그런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짧은 호흡의 문장들임에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깊이 있어 독자의 눈길을 자주 한곳에 묶어놓는다. 저자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향한다. 책에 실린 여러 단상들을 의미 있게 연관시키는 열쇳말이 ‘은둔기계’다. 저자가 말하는 은둔은 초연하고 귀족적인 탈속이나 세계도피가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거리 두기’나 ‘정신적 간격의 확보’와 같은 일상적인 실천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은둔을 시작했다. 인간은 음식물을 절단하는 기계, 언어를 구사하고 멈추는 기계, 숨을 쉬고 끊는 기계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는 ‘은둔기계’이기도 하다. 과열된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나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은둔하는 기계. 지금 우리에게는 사교가 아닌 은둔이 필요하다. “세계는 좁아져 있다. 숨을 곳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완벽한 범죄는 존재하기 힘들다. CCTV와 인터넷 아래 모든 것이 감시되고 발각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은 매우 안전하고 편리한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만큼 숨을 곳이 없어졌다. 카메라 밖으로,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SNS를 하지 않을 자유. 잡다한 정보를 보고 듣지 않을 자유.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 너나없이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려는 욕망이 들끓는 시대이지만, 그에 따른 피로 역시 곳곳에 완연하다. 평범한 일상 포스팅에도 광고가 스며들고, 유행하는 카페에 가서 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하면 뒤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퍼져나가기도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스토킹당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목록의 상위항목엔 항상 아이돌 가수가 올라 있지만, 반면 악플에 목숨을 끊는 연예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과도하게 연결되고,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몰려 있다. 김홍중은 이런 문제들이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초연결사회에서는 오히려 단절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창조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가? 끊어짐과 연결됨 사이에 얼마나 생동감 있는 리듬을 설계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누군가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군가는 음악으로, 누군가는 산책으로, 누군가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멀리 있지 않다. 그곳은 발명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동물,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다” 김홍중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은둔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페이션시patiency라는 단어를 통해 ‘은둔기계’의 특성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페이션트patient’, 즉 ‘환자’에서 유래하는데, ‘견뎌냄’ ‘견디는 힘’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환자는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해지는 질병과 치료를 수용하는 자, 즉 감수하는 자다. 여기서 저자는 십자가를 감당하는, 헐벗은 예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견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세계는 견디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서구 사회이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파악해왔다. 그것은 활동적 남성을 모델로 한다. 하지 않는 것은 무시되거나, 존재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는 하는 자들뿐 아니라 겪는 자들도 존재한다. 은둔기계는 이들과 썩 닮아 있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저 감내한다.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유민처럼 흩어져, 도주하며, 완강하게 잔존한다. 동시에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바이러스와 인간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바이러스’에 관한 글이다.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는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COVID-19를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행위자agent와 대면하게 되었다. 바이러스의 통제하기 어려운 미세한 작용, 기존의 사회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재구성하는 힘, 사회적 삶에 가져온 파괴적 영향력의 폭과 깊이를 매일 느끼고 지각한다. 만일 바이러스가 생명과 활동력이 없는 무언가라면, 타인과의 악수를 꺼리거나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는 것,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겁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 인간은 이미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홍중은 21세기 문명에서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명칭이라는 함의를 넘어서, 시대의 탁월한 존재론적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현상, 미디어적 현상, 경제적 현상, 심리적 현상, 사회적 현상, 기호학적 현상 모두가 바이러스적viral이다. 생각의 아상블라주 이 책은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하듯, ‘전체’가 아닌 ‘파편’이 더욱 강렬한 책이다. 야구나 영화 같은 일상적인 소재에서부터 철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관한 단상까지 다채롭게 담겨 있다. 저자가 여행을 다니며 떠올렸던 생각들도 파편화된 형태지만 은은하고 아름답게 쓰였다. 그리고 모든 글에는 ‘은둔’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생각의 아상블라주. 이 책은 그 자체로 김홍중이 말하는 은둔의 한 형태라고 할 만하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은둔기계』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인문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