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로 보는 중세의 사회와 문화
‘동물’은 오랫동안 역사가들에게 외면 받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 이외의 다른 동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인간이 생존을 유지해가는 사회적ㆍ문화적 양식에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이런 점에서 동물도 인간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회가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과 분류체계를 통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더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중세 유럽 사회가 동물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다양하게 전해진다. 3세기 무렵에 근동 지역에서 처음 나타났던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를 비롯해 사냥서ㆍ수의학서ㆍ농경서ㆍ승마 교습서ㆍ동물도감ㆍ동물우화집ㆍ매 훈련 서적 등 중세에도 동물을 소재로 한 문헌들은 다양한 형태로 활발히 제작ㆍ유포되었다. 집단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나 채색수사본의 여백, 그림ㆍ조각 등에 표현된 동물들도 중세인들이 동물들과 맺고 있던 관계나 저마다의 동물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 사회의 동물에 관한 사고와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서기 1천년 무렵에 나타나 인기를 끌었던 ‘동물지(Bestiarium)’라는 장르의 문헌들이다. 10세기에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사들의 손끝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문헌들은 12~13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제작되고 보급되었다. 그러다 15세기 이후부터 점차 쇠퇴하였는데, 오늘날에도 상당한 수량의 필사본들이 전해지고 있어서, 이 장르가 당시에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세 동물 상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
중세 동물지를 가리키는 라틴어 표현인 ‘베스티아리움(Bestiarium)’이라는 말은 ‘동물’을 가리키는 ‘베스티아(Bestia)’라는 낱말에서 온 것으로, ‘동물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베스티아리(Bestiary)’, 프랑스어로는 ‘베스티에르(Bestiaire)’라고 부른다.
중세 동물지는 동물마다 항목을 구분해서 삽화와 함께 그 동물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근대의 동물백과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중세 동물지는 근대의 동물백과와는 달리 동물의 해부학적 구조나 행동 양태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동물의 본성, 곧 그 동물이 상징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적ㆍ종교적ㆍ사회적 의미를 서술하는 것에 주된 목적을 두고 있다.
이처럼 중세 동물지에는 동물들의 다양한 특성들이 신앙이나 도덕, 인생의 교훈과 상징적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중세의 설교ㆍ조각ㆍ속담ㆍ도장ㆍ문장ㆍ우화 등의 분야에 두루 활용되었으며, 어떤 장르보다도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폭넓게 인기를 끌고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중세 동물지는 중세의 동물 상징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뿐 아니라, 중세인의 신앙과 가치관, 풍속과 상식 등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물지 안에는 중세 교회의 이데올로기ㆍ중세 유럽 사회의 민속과 상식 등이 생생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까지 필사본들이 비교적 풍부히 잘 보존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어서 시대와 지역에 따른 변동을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중세의 상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보물창고
제작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필사본마다 수록하고 있는 동물의 수와 내용 등이 다 다르지만, 동물지 장르로 분류되는 문헌들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공통으로 나타난다.
첫째, 동물지에는 사자ㆍ곰ㆍ원숭이ㆍ개ㆍ까마귀ㆍ고래 등 실재하는 동물만이 아니라, 용ㆍ유니콘ㆍ불사조ㆍ그리핀처럼 다양한 지역들의 다양한 전통들에서 비롯된 상상의 존재들도 나온다. 신비한 돌이나 식물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는 유니콘처럼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존재이다. 예컨대 인도에 있다는 ‘페린덴스(perindens)’라는 나무는 매우 달콤한 과일이 열릴 뿐 아니라, 비둘기들의 천적인 용이 그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기겁을 하고 도망치기 때문에 비둘기들의 안전한 휴식처가 된다는 식이다.
둘째, 실재하는 것이든 상상에만 있는 것이든 동물지에는 겉모습ㆍ행동ㆍ습성ㆍ본성뿐 아니라, 이름의 기원ㆍ관련된 신화와 믿음ㆍ다른 동물이나 인간과 맺는 관계 등이 그 동물의 ‘특성’으로 서술되어 있다. 동물지의 동물은 인간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늘 인간의 의식과 삶 안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동물지에서는 신화나 민속과 같은, 오늘날에는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비롯된 요소들도 동물의 객관적인 특성으로 설명된다. 하이에나는 어떤 때는 수컷이었다가 어떤 때는 암컷으로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동물이며, 딱따구리한테는 점치는 능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동물지에는 고대의 전통으로부터 이어진 유럽 사회의 민속과 신앙, 속설 등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풍부히 담겨 있다.
셋째, 동물지는 두 개의 단어와 개념, 두 가지 사물ㆍ사건ㆍ상황 사이의 얼마간 막연한 유사성이나 상응성에 기초해서 관계를 밝히면서 감춰진 진실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중세 동물지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생물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의 의도된 상징적 재현이다. 그래서 모두 감춰진 의미에 대한 어떤 상징적 역할을 담당한다. 유니콘의 이마에 솟아 있는 한 개의 뿔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여겨졌고, 머리는 있고 꼬리는 없는 원숭이는 하늘의 천사였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소멸될 악마를 나타낸다고 해석되었다. 곧 중세 동물지에서 자연은 신의 세계가 비추어지고 있는 거울이자, 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였던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근대에 들어서면서 한때 동물지는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근대 자연과학의 관찰 결과와 비교하며 동물지의 ‘비과학성’을 강조했고, 그러면서 그것을 중세의 ‘낡고 뒤처짐’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현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맥락 안에서 바라볼 때, 동물지는 중세인들의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역사학ㆍ인류학ㆍ문화학ㆍ언어학 등의 경계를 허물고 연구 주제의 범위를 넓히려는 역사인류학에 그것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연구 대상이 된다. 동물지는 동물들에 대한 가치평가와 분류를 통해서 중세의 사회와 문화가 지닌 특성과 그것의 변화 과정을 그 시대의 가치체계 내부로부터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물지에 표현되어 있는 중세의 상상과 상징은 주관적인 독창성이 아니라, 교육과 관습 등을 통해 사회화된 감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지 안에 교묘히 감춰져 있는 그 시대의 정치적ㆍ종교적ㆍ도덕적 메시지와 규범들, 지배 논리, 사회 갈등과 불안 등을 통해서 중세인의 사고와 문화를 더욱 생생하게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나아가 동물에 대한 이러한 상징체계는 사회가 변화해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중세 동물지는 오늘날 다양한 문화 상품을 통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서구의 동물 상징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종의 필사본 내용을 종합한 국내 최초의 완역본
이 책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중세 동물지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나아가 동물지 장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2세기~13세기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다양한 계통의 필사본들의 내용을 종합해서 중세 동물지의 모습을 가장 총체적인 형태로 구현해 놓고 있다. 이 책이 번역의 기초로 삼은 것은 영국 애버딘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