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공산주의자 로산나 로산다Rossana Rossanda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너희는 확신을 품고 살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군’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우리는 의문을 품고 살았다.” 
탈이데올로기 시대,
좌파의 생각을 되짚어 좌파의 앞길을 열다!
책은 오늘날 ‘정치는 광범위하게 탈이데올로기화 했다’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서 “중도 쪽으로 떠밀려 간 정당은 더 이상 아무런 사상도 없고, 거대한 목표도 추구하지 않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저자 로베르트 미지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관련 저술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좌파 사상과 운동의 과거이자 현재인 유럽의 정당이나 사회운동세력들은 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따위의 거대 이념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좌파들도 여전히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제국주의에 저항한다. 하지만 예전의 좌파가 그랬던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이론을 다룬 논문이나 벽돌 두께만한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들을 “느낌의 좌파”라고 부른다. 이렇게 된 까닭 또한 탈이데올로기화에 있다. “지난날 좌파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지만, 오늘날 좌파에게 이 모든 확신은 산산조각 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좌파 사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다수 평균적인 좌파가 생각하듯이 이는 그저 약간의 감정을 앞세운 공상적 사회계량가의 입장에 불과할까? 지난 150년 동안 시도해온 이론적 성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위일까? 책은 이 질문에 대해 마르크스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좌파의 생각들을 되짚음으로써 답을 내놓는다.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공통감각’이 되었나
흔히 ‘Common Sense’를 ‘상식’으로 옮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공통감각’으로 옮겼다(다만 책 제목에서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상식으로 썼다). 당대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하니 상식보다 훨씬 이해가 빠르다. 이렇게 번역한 까닭은 이 책이 좌파 사상이 시대가 흐르면서 공통감각이 되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그리스 재무장관을 지낸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어떻게 해서 예측불허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을까요? …저는 이런 내용을 ‘고상한 사회’에서는 절대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 수염을 기른 남자(마르크스를 가리킨다-옮긴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력을 계속 쌓는 동안 마르크스를 거의 완벽하게 무시했고, 제 최신 정치 이력서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기입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데도 지금 마르크스를 거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경제학조차 마르크스가 주창한 비판 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견해를 밝히라는 요청을 받으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소급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 오늘날 일부 경제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학파가 마르크스를 인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마르크스가 끼친 공로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다르게 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역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독을 막을 수 있는 면역 체계와도 같습니다. 다음 같은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는 사적으로 생산된 뒤 거의 불법이나 다름없는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에 의해 강탈당한다’는 주장에 너무 쉽게 빠져듭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공부한다면 사실은 정반대라는 점, 즉 ‘부는 공동으로 생산된 뒤 생산 관계와 소유권을 근거로 사적으로 취득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낡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론은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는 틀이자 신자유주의의 독을 막을 수 있는 면역 체계로써 여전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자다”라는 명구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를 위시한 좌파 사상이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세계사적 흐름에서 좌파 사상의 구체제로 등장한 소비에트의 몰락과 유럽 사민주의의 후퇴, 반대편 자본주의의 견고한 발전 때문이다. 하지만 좌파 안의 문제도 있다. 그 핵심은 좌파 사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그람시-아도르노-하버마스-푸코와 그 동료들로 이어지는 좌파 사상의 흐름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그리고 새로운 개념들의 등장하면서 이론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러한 좌파의 흐름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또한 각 이론에 따라 학파가 생기고 학파에 따라 세상을 재단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좌파는 분화한다. 더 이상 좌파의 사상은 하나가 아니며 좌파 또한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현대 좌파를 ‘모자이크 좌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좌파가 갈갈이 찢어져 존재한다고 해서 좌파 사상이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계급’은 물론이고 그람시의 ‘시민사회’와 ‘헤게모니’, 아도르노의 ‘비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푸코의 ‘담론’ 같은 개념들은 이미 좌파를 넘어 당대의 공통감각이 된지 오래다. 이런 말들을 쓰지 않고 이제는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 것이며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
책은 좌파 사상의 여전한 유용성을 설파하기 위해 마르크스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좌파 사상의 흐름을 간명하게 짚어낸다. 얇은 책에 그 많은 내용을 어떻게 담아냈을까 놀라울 정도다. 따라서 좌파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특히 좋을 책이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즉 단순히 좌파 사상 공부에 도움을 주는 데에만 있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좌파들에 대한 분명한 주장이 담겨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공산주의자 로산나 로산다(Rossana Rossanda)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너희는 확신을 품고 살지 않았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군’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우리는 의문을 품고 살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항상 불분명하며, 이제까지의 분석은 모두 허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좌파 사상은 단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었다. 항상 흔들리는 지반 위에 있었다. ‘모자이크 좌파’는 좌파의 속성이자 숙명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탈이데올로기 시대, 위기에 빠진 좌파의 앞길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모자이크 좌파’들의 연대이다.
이 책은 좌파 사상에 대한 좋은 교양서이자 예리한 정치 에세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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