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작가도 관객도 다 같이 누려야 할 예술적 사유 매뉴얼
‘예술로서의 철학’과 ‘철학으로서의 예술’을 꿈꾸는 지은이가 처방한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의 효과적인 사용법. 이 책은 작가이자 이론가인 지은이가 정년퇴임 후 그동안 미술교육 현장에서 간간이 이야기해왔고, 또 하고 싶었던 바를 강의하듯이 들려준다. 그것도 니체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의 성과들을 바탕으로, 예술에 대한 고질적인 통념에 제동을 걸면서, 현대예술 작업과 작품 감상에 대한 전복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지은이는 이미 두 권의 미술에세이 『전환기의 현대미술』(1991)과 『미술과 비평 사이』(1995)를 낸 바 있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현대미술의 이론을 넘나들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서구의 현대미술을 소화하고 소개해왔다. 묵직한 내용을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지만 일단 정독을 하며 ‘사용’해본 이들에게는 현대미술의 길을 밝혀준 등불이었다. 이들 책이 기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라면, 이번 책은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원고지 1,200여 장 분량으로 쓴 전작(全作)다. 지은이가 칠십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을 ‘사용’하는 사유의 체형이 날렵하고 싱싱하다.
예술에 대한 통념과의 뒤집기 한판
“내 작품을 읽지 말고 이것을 이용하여 세상을 보고 자신의 내면을 읽는 데 사용해보라.”(마르셀 프루스트)
이 책은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사용’에 방점이 찍혀 있다. 지은이가 먼저 ‘사용’해본 현대철학을 바탕으로 ‘효과’를 본 예술적 사유를 소개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뒤집기’가 되겠다. 현대철학의 힘을 빌어서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습적인 이해를 뒤집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사유세계를 배치한다.
서구 ‘근대’ 이후의 예술작업이란 당대의 대중적 감성이나 통념에 대한 저항이었고 도전이었다. 현대예술은 언제나 당대의 공통적인 이념이나 감성과 불화해왔다. 그러하기는 현대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떤 토대와 전제도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사유를 하고자했기에 일반인에게 현대철학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대예술과 현대철학은 서로 내통하는 관계에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 작업이란 작가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이고, 작가가 의도한 바를 표현한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상은 작가가 작품 속에 꼬불쳐둔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솔직한 느낌은 숨긴 채,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작품에 들어 있(다고 보)는 지은이의 의도 찾기에 집중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통념을 의문에 부친다. 작가가 자기 의도대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 지은이는 ‘표현’이라는 어휘부터 재검토한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표현될 것이라는, 표현과 의도가 일대일로 대응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의 실상을 직시하면서, 이제 이 같은 단선적 인과론의 난센스는 접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그림에서 표현이란 무수한 경우 수의 우발점들을 발생시키는 과정이자 장치”이기도 한 탓에, 의도된 것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 의도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림을 직접 그려보면 내 뜻과 달리, 역시 그림으로 ‘표현된’ 것만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282쪽)
즉 더 이상 표현주체인 작가가 표현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표현의 ‘의도성’이란 원래 무기력/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표현은 단선적 주종관계/인과관계를 넘어 서로 상관됨으로써 항상 그때그때 다르게 작동”(292쪽)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자발성보다는 비자발성, 필연성보다는 우발성에 주목하며, “우리의 의도성에 압박받는 표현과 달리 때때로 표현에 빛이 되는 우발성의 미덕을 일깨워보고자”(109쪽) 한다.
감상이라는 체험은 또 하나의 창작이어야
지은이가 보기에 작품 속의 의미를 읽어낸다는 말도 수상하다. 이는 작품 안에 작가가 의도한, 내장된 이미지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예술적 사유란, 철학적 사유와 마찬가지로 우리 통념과의 싸움인 것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내가 만나는 의미의 세계조차 내가 (이미) 투영한 의미일 뿐이지, 대상에 고유하게 내재해 있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 각자의 이해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셈이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유/의도/의미는 담기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생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서로 나누게 되는 체험임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그때그때 감응하는 역동적 흐름임”(이상의 인용은 303쪽)을 알 수 있다.
지은이의 뒤집기는 보는 문제에서도 확인된다. 미술작품은 눈으로만 보는 것일까? 아니다. 지은이에 따르면, 미술작품을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이라는 감상태도는 순진하다. 이 역시 작품이란 관객과 무관하게 완성되는 조형물이라는 전근대적 생각의 산물일 뿐이다. 지은이는 ‘본다는 것’은 온몸을 던지는 행위라고 한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 나아가서 정신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적 행위”(298쪽)라며, 눈 중심의 감상태도를 신체행위로 교정한다.
사람들의 감상태도도 문제이기는 매한가지다.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소감은 대부분 ‘난해하다’거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작품은 이성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응고물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모든 사물의 존재의 의미는 바로 그것을 이해하려는 현존재에 종속”(41쪽)되기 때문에, 작품에 숨겨둔 (것으로 착각하는) 의도를 찾으려는 관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예술이란 미적 오브제를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달린 문제라기보다는, 예술대상에 개입하듯 상호 반응하는 예술적 ‘체험’이라는 문제의 비중으로” 드러나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창작자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의미의 체계에 의존하는 쪽이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대상의 설정을 일으키는 복합적 만남이라는 체험을 상호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문제를 말한다. (중략) 그러므로 감상이라는 체험조차 창작의 한 측면이라는 문제의식의 유발이어야 하고 그것과의 만남”(뒤표지에서)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관객의 의문과 질문에 따라, 동일한 작품도 얼마든지 다른 응답이 구성될 수 있다.
또한 독창성이라든가 오리지널 같은 개념도 그 자체가 일방적 창조성이라는 독단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빛바랜 관념이자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제 창조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태도’를 꼽는다.
지은이가 뒤집기는 이처럼 한둘이 아니다. 그것도 통념의 실상을 뿌리까지 파헤치되, 파헤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예술을 구출해낸다.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린 작품의 의미와 효과
현대철학은 생성 자체를 사유한다. 말하자면 기존의 정해진 의미가 아닌, 그때그때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지은이는 의미가 우발적인 사건을 통해 어떻게 구성되고 만들어지는가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용’에 달렸다고 한다.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미술작품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를 알려주고, 사물의 의미란 “결국 사물이 사용될 때마다 만들어지고 나타나는 효과”(311쪽)임을 알려준다. 예술적 체험이란 저마다 누리는 사용함의 효과에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사용’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용’한다는 것은 텍스트의 어구를 인용하듯 (단순히) 그렇게 활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용’이란, 어떤 감화로 인해 사용자가 자기의 감성과 생각을 바꿔먹고 나서 스스로 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