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행정의 미학에서 미학의 행정으로! 시공간의 경험이 동질화되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소 특정적 미술은 그 비판적 가능성을 어떻게 모색하고 있는가? ‘장소 특정성’이라는 유행하는 기호 ‘장소 특정성’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전시 카탈로그 에세이, 보도자료, 기금 신청서, 잡지 리뷰와 미술가의 선언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빈번하게 눈에 띄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나아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미술관 전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비엔날레 등의 미술 축제, 건축적 설치에 이르기까지 ‘장소 특정성’이라는 말이 거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미술가, 건축가, 딜러, 큐레이터, 비평가, 미술 행정가, 그리고 기금 단체까지도 이 용어를 자동적으로 ‘비판성’이나 ‘진보성’의 기표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60년대 미니멀리즘의 교훈으로부터 발원하는 이 용어가 오늘날 단지 미술 장르만이 아닌, 비판적 도시이론, 미술과 건축에서의 공간과 정치 문제, 그리고 정체성 정치와 공공영역에 관한 논의 등 도시생활과 도시공간을 조직하는 폭넓은 사회·경제·정치적 과정들을 문화적으로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장소 특정성: 물리적 장소에서 가상적인 장소까지 ‘장소(site)’란 무엇인가? 장소 특정적 미술이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이래로 ‘장소’의 개념은 미학적 전위주의와 정치적 진보주의의 수사를 수반하면서 단계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저자는 이 책의 첫째 장에서 장소 특정성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처음에는 장소에 대한 현상학적이고 경험적인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크기, 규모, 질감, 벽·천장·방의 치수 사이의 관계, 채광 상태, 지형적 특징, 교통 상황, 기후의 계절적 성격 등 개별 입지가 지닌 물리적 속성의 집합으로 규정되면서 은연 중 미술관이라는 초역사적인 공간에 의탁하는 모더니즘 미술에 근본적인 차원의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미술의 공간은 도시 공간의 한복판이나 자연 풍경, 일상적 공간 등 미술과 무관한 다양한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미술을 위한 공간은 더 이상 미술관이라는 텅 빈 벽이 아니라 실제의 장소로 인식된 것이다. 그 결과, 작품이 만들어지는 처소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 방식,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 역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장소는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을 규정하고 유지하는 제도, 즉 스튜디오, 갤러리, 미술관, 미술시장, 미술비평 등의 사슬 혹은 네트워크로 새롭게 이해된다. 이후 미술의 장소는 또다시 재정의되어, 미술의 맥락을 넘어서서 좀더 ‘공공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제 장소는 훨씬 광범위한 문화적.사회적 담론의 장을 가로질러 전개되고, 지도라기보다는 여행 일정 같은 것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적인 미술가들의 움직임을 통해 상호 텍스트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광고판, 미술 장르, 소외된 지역공동체, 제도적 틀, 잡지 지면, 사회적 대의, 또는 정치적 논쟁 등으로까지 다양해진 장소의 개념은 실제 거리 모퉁이처럼 실질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이론적 개념처럼 가상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의 위상 장소 특정성이라는 개념의 출현, 예술가와 작품, 관객을 둘러싼 이러한 변화가 생긴 데는 기존의 모더니즘 미술 안팎을 둘러싼 제도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세계적으로 대도시의 건축 외관이 점점 더 동일해지고 따라서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한층 희박해지는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에 장소 특정적 미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현상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즉 ‘차이’가 사라진 일률적인 도시 환경에서 장소 특정적 미술이 한 도시를 다른 도시와 구별시키는 특징을 부여하는 도구로, 장소의 차별성과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을 제공하는 유용한 공공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시공간의 경험이 동질화되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역적 특수성이 소멸되고, 지리적 위치에 기반을 둔 개인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현대사회의 불안을 장소 특정적 미술을 통해 이론화하고 있다. 자본과 정보, 문화가 글로벌화되면서 미술가들 역시 더 이상 작업실에 안주하는 오브제 제작가가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면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주하며 작업을 펼치는 현대판 유목민이 된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날 성공한 미술가의 시금석은 항공사의 누적 마일리지로 간단하게 판가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공한 미술가일수록 뉴욕, 베니스, 카셀, 서울, 도쿄, 상하이, 베를린, 암스테르담 등 세계의 주요 도시를 빈번하게 오가게 마련이며, 따라서 이주의 빈도를 나타내는 항공사의 누적 마일리지야말로 성공한 작가의 지표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노마딕한 삶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이라고 찬미했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구체적인 장소, 완전한 소속감과 동질성을 보장하는 ‘올바른 장소’에 대한 심리적인 집착과 향수어린 욕망을 벗어버릴 수 없다. 저자는 이처럼 고정된 장소에 대한 향수와 노마딕한 유동성에의 매혹 사이에서 부유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의 분석을 통해 현대미술의 비판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나아가 주체의 형성과 공간의 관계라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