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의 개정판입니다. “만약 히틀러에게 절친이 있었다면, 바로 나일 것입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던 제3제국(1933~45)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선전장관 괴벨스, 나치 친위대 창설자 힘러, 게슈타포 창설자 괴링 등이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실세로서,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가해자로 수없이 언급되어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슈페어가 이들만큼 세간의 호기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꽤나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히틀러 주변에서 매우 드문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슈페어는 히틀러가 이룩하고자 했던 세계를 그대로 구현시켜줄 총애 받는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전시 중에는 유능한 군수장관으로 일하며 결과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틀러가 정치적 입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직업을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았을 겁니다.”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1905년 태어났다. 비판적 언론 <프랑크푸르트차이퉁>이나 <유겐트>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그의 아버지는 강력한 사회 개혁을 주창하는 사상에 동조했다. 지루하게 이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은 이 지식인 부르주아지 가문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슈페어는 타이어를 구하기 어려워 멈춰져 있던 바캉스용 차량이나, 집에 드나들던 장교들의 초대로 구경했던 비행선 체펠린과 함께 1차 대전을 떠올린다. 문제는 전후였다. 패전 이후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정치적 무질서에 빠져든다. 젊은이들은 여러 사상가들에 환호하며 열정적이었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진보적이었던 이들도 남몰래 나치당 가입서류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강력한 질서에 매혹당했다. 그는 회고한다. “위대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나는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은 것이다. 히틀러는 괴테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위대한 건축 과업’을 위임받았습니다.” 히틀러는 총리 청사나 관저 설계도를 직접 그릴 정도로 건축에 열정을 쏟았다. 베를린 도시계획이나 뉘른베르크, 뮌헨 재건 계획에 세세하게 관여했고, 현장 시찰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파리와 빈을 도시계획의 기본으로 삼았다. “베를린은 큰 도시야. 그러나 진정한 대도시는 아니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파리를 보라고. 아니면 빈. … 우리는 반드시 파리와 빈보다 멋진 도시를 건설해야 하네.”(120쪽)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두 도시보다 더 크고 웅장한 도시를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가 베를린에 세우고자 했던 개선문의 크기는 198미터 지경의 돔에 100미터 높이였다.(비용은 최소 1억 6,000만 제국마르크로 예상되었다.) 이에 슈페어는 “놀라운 것은 그 건물들의 웅장함이 아니라, …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에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 오로지 전쟁으로만 가능한 제국의 승리를 표현하는 건물을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생각하면, 불길한 충격으로 다가온다”(120쪽)고 쓰고 있다. 히틀러의 건축적 열망은 전쟁 중에도 꺼지지 않았다. 수백만 마르크를 들여 잘츠부르크의 쓰러져가는 클레스하임 성을 고급스러운 게스트하우스로 고치는 공사를 진행했고, 전후 히틀러를 위해 지어질 건물들을 장식하는 데 쓰일 러그와 태피스트리는 차질 없이 생산을 계속하도록 했다. “우리는 지금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1942년 4월은 독일의 전세가 뒤집힌 전환점이었다. 패색이 짙어지면서 히틀러는 판단력을 잃어갔다. 그는 적의 정보기관이 실제 목표 지점에서 엉뚱한 곳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슈페어가 시찰을 돌며 찍어온 피난민 행렬 사진도 히틀러는 못 본 척했으며, 패배한 군인은 “피 흘리며 죽어가 전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패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조차 들으려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전세에 대한 일반화와 결론을 내리는 일을 금지하겠소. 그것은 나의 직무요. 앞으로는 전쟁에 패배했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시에는 누구든지 반역으로 간주하겠소.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지 않고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처벌이 돌아감은 물론이오!”(673쪽)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슈페어의 보고서를 본 히틀러는 이후부터 슈페어를 무시했다. 이렇게 참모진의 입을 막은 나치 지도부는 언론을 장악해갔다. 공공연하게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비밀병기’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선전장관 괴벨스의 작품이었다. “상황의 회복”과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라는 구호와 함께 ‘비밀병기’가 있다는 환상은 일부 지도부뿐 아니라 대중의 눈과 귀를 막았다. 이 와중에도 부패한 나치 지도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온갖 이유’로 큰 집과, 사냥 별장, 농장과 궁전, 많은 고용인, 풍성한 만찬, 최고급 와인 셀러를 필요로 했다. 전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1944년 생일을 맞은 괴링은 지금까지처럼 화려한 파티를 주최했다. 전쟁 통에 큰돈이 어디에서 났을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주 의회는 매년 괴링의 생일선물 비용으로 수천 마르크를 전달했다. 전쟁 물자는 부족한 시점에서도 군수 물자 개발과 생산에 부족한 노동력은 지도부의 안위를 지키는 데 유용되었다.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 같으니!” 항복 선언 후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기민하고 뛰어난 듯 보였던 제국의 각료들은 그러나 법정에서 그저 비겁한 멍청이 행세로 책임을 면하려 애썼다. 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류가 제시되면 무조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고 설명한 지도부를 향해 슈페어는 고함을 지른다.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 같으니!”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후 오랫동안 회자되는 ‘자기변호와 반성이 매우 영리하게 뒤섞인 피고인 증언’을 시작한다. “정치인에게는 개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 쪽마다 내부자가 아니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에피소드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히틀러의 건강염려증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기이한 식생활과 반려견에 대한 애정, 사치스러운 히틀러의 애인으로 알려진 에바 브라운의 속사정, 독특한 옷차림을 선호했던 괴링의 취향, 더할 나위 없이 부패한 나치 정권의 이면 등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전모 역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하지만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자기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은 여전하다. 단순히 그가 교수형을 면해 못마땅해서는 아닐 것이다. 슈페어는 나치 정권을 유지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장시킨 권력자였고, 동시에 철저히 나치당 당원으로서 활동한 괴벨스나 악의 고리 끝에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홀로코스트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아이히만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뒤늦은 반성과 참회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슈페어는 목숨을 부지했고, 우리에게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남겼다. 모든 악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더미 위에서 책임과 반성을 외친 그를 어떻게 판단할지, 선량한 나치로 기억할지 아니면 잔악한 전범으로 기억할지는 오롯이 역사의, 그리고 독자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