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과 우리 사회가 믿는
우리 미래의 힘과 깊이가 바로 그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황현산의 생애 첫 산문집
황현산, 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서두부터 호들갑을 떤다고 뭐라 하실 수 있겠지만 단언컨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안도되는 어떤 바가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저랍니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프랑스 현대시도 그가 읽어주면 달랐습니다.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모른 채 골방 속에서 시와 함께 곰팡내를 풍겼던 우리 시인들 가운데 그가 끄집어내어 볕에 몸 말리게 한 사람 또한 몇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황병승 시인이 그러했고, 김이듬 시인이 그러했으며, 그밖에 그의 해설로 다시금 재조명되어 한국 시단의 새로움이 된 시인들로 치자면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 정의의 이름으로 바로 서지 못하는 순간순간을 목도하고 그때마다 더 크게 부릅뜬 눈으로 그 안타까움과 분노를 글에 새겼습니다. 그가 밤마다 눈물로 써나간 글은, 그러나 아침이면 우리들 몸속에 피로 돌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운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세상을 희망으로 껴안을 수 있게 인도하는 참 ‘어른’의 운명으로 지금껏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밤이 선생이다』를 펴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선생은 밤에 일하는 자로 유명합니다. “어둠 속에서 불을 얻어온다”라는 말을 문학에서 쓰듯 어둠을 불로 쓰는 것인데,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선생님의 속내로 보자면 타당성이 더할 것 같아 살짝 옮겨봅니다.
“내가 비평할 때 분석하는 이유는 분석이 안 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예요. 깊이가 있다는 말은 나는 모른다는 말과 같아요. 바위 속에 혼이 들어있다는 건 그 안에 귀신이 있다는 건데, 다시 말해 그 속에 내가 모르는 게 있단 거죠. 그게 곧 깊이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밝은 곳에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다 아는 가능성이고 어둠 속에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린, 열릴 길입니다. 때로는 그 가능성 자체가 문학이죠.”
-『GQ』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번 책은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처음 엮는 선생의 첫 산문집입니다. 1980년대부터 201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십여 년의 세월 속에 발표했던 여러 매체 속 글 가운데 이를 추려 1부와 3부에 나누어 담았고, 그 가운데 2부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두 사람인 강운구, 구본창의 사진 가운데 이 책을 말하는 데 있어 그 기저의 비유가 될 수 있는 몇 컷을 골라 글과 함께 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둠은 더욱 많아집니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빛나는 순간은 아주 가끔이죠.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이가 들면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용서하게 된다는 거예요.”
선생의 산문을 보자면 놀랍게도 그의 연배를 잊게 합니다. 어떠한 미사여구의 도움 없이 단문으로만 치고나가는데 참으로 강골 있으니까요. 선생의 산문은 위에서 누르는 식의 ‘말씀’이 아니라 함께 어깨동무하고 보폭 맞추는 ‘행동’이라고 해야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우리를 절로 깨어나게 하거든요. 그렇게 자리에서 거리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거든요. 예컨대 이러한 문장들 앞에서 우리 각자 무릎 탁 친 연유 뒤에 할 일이 무얼까 하고 보자면 말이지요.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p21「소금과 죽음」 중에서
그런데 묘합니다. 송곳보다 더 뾰족하고 망치보다 더 단단한 선생만의 ‘일침’ 뒤에 묘하게 남는 게 어떤 ‘슬픔’인 걸 보면요. 때로는 화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때로는 애정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그 감정의 묻어남이 사뭇 절절한데도 왜 지렛대의 가운데자리에 서지 않았냐고 평론가인 그에게 따져 묻지 못하는지…… 우리 시대에 진심을 다해 진실을 말해주는 스승이 어디론가 다들 숨어버린 까닭에 선생 혼자 그 감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눈 없고 귀 없다 해도 삶이야 살아지겠지요. 그러나 ‘현재’라는 말을 그 앞에 붙인다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눈 없고 귀 없이 지금의 ‘오늘’을 사는 거라 말할 수 있을까요? 선생의 산문은 바로 그런 ‘정의’를 말해왔습니다. 순전히 순정으로 옳다, 하는 방향으로만 시선을 모을 때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 그 움틈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유행을 좇고 돈 앞에 머리 조아리며 권위 뒤로 숨는 우리들 삶의 유일한 본보기가 아닐는지.
『밤이 선생이다』에는 총 여든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습니다. 선생의 말마따나 “결과적으로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한데요,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밑줄을 쫙 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포기할 수 없는 전망 하나와 줄곧 드잡이를 해온 것 같기도 하다”라는 구절이었는데요, 이렇듯 선생이 평생을 걸고 싸운다는 그 ‘전망’, 모름지기 저마다 여러 단어들로 대입이 가능한 그 ‘전망’ 앞에 나는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일까 오래 되새김질을 해보게도 되었습니다. 아, 이렇듯 평생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어떤 대거리가 있어 선생은 그토록 젊고 유연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문득 도통 늙을 줄 모르는 그 ‘감각’에 부러움이 일기도 하였고 말이지요.
책 표지는 독일 현대회화를 이끌고 있는 팀 아이텔의 그림을 삼았습니다. 로마어, 독일어, 철학에 회화를 전공하여 미술 뿐 아니라 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이 많다는 그는 자신이 그려낸 인물과 선생이 이토록 닮을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밤에 일하는 자들의 표정은, 그 뒷모습은 이처럼 숭고할까요. 이는 편집자의 사담이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