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문을 닫은 
최초의 시설이 되기까지, 
‘향유의집’ 거주인과 임직원이 함께 통과한
놀랍고, 치열하고, 아름답고, 험난했던 연대의 기록
“더 이상 우리를 시설에 가두지 마십시오. 여기서 당신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2021년 4월 30일, 한국사회 최초로 장애인 거주시설이 문을 닫았다. 관할 지자체 등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시설/법인 측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자발적인 폐지’였다. 이제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이 시설은 경기 김포에 위치한 ‘향유의집’이다. 
발단은 한 장애 당사자 거주인(한규선)이 시설 내부의 비리를 최초로 고발하고 공론화한 사건이었다. 시설을 운영하는 석암재단 측이 거주인 개인에게 지급되는 장애수당을 오랫동안 갈취해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몇몇 거주인은 대부분의 일상을 같이 보내는 직원(생활재활교사)들에게 비리 폭로에 함께해줄 것을 부탁하고, 거주인과 직원들이 합심해 재단의 각종 비리를 증명할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투쟁의 물결은 급속도로 확산된다. 직원들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같은 외부의 장애운동단체 및 탈시설운동가들과 접촉하며 비리 문제를 세상에 터뜨린다. 거주인들은 향유의집 관할 지자체인 양천구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서울시청과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벌이며 본격적인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시설 내부 비리를 척결하자는 취지였던 애초의 투쟁이 탈시설운동으로 확장되고, 시설이 스스로의 의지로 문을 닫게 되기까지는 탈시설 장애운동가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투쟁이 단지 비리 사실 폭로에 그치지 않고 시설 자체를 폐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실제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직접 시설 내부로 들어가 임원/운영진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설을 해체하러 온 시설 운영진(장애운동가), 거주인, 시설 직원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탈시설’과 ‘자립’을 일궈내기까지, 그 치열하고 아름답고 험난했던 연대의 과정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한국사회 최초의 자발적 시설 폐지라는 이 전례 없는 사건은 ‘시설사회’와 ‘시설 vs 탈시설’ ‘가족 vs 시설’ 따위의 이분법을 뒤흔들며 탈시설운동의 대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국가와 재벌 사회복지법인이 공고히 해온 침묵의 카르텔과 그것이 만들어낸 전제(‘장애인이라면 당연히 시설에 살아야 한다’)를 이제는 깨부술 때가 되었다. 향유의집 거주인과 임직원이 보여준 뜨거운 투쟁은 앞으로 무수히 많은 탈-시설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한국사회 최초의 장애인 거주시설 폐지 사례: 비리·인권 침해 고발에서 탈시설운동까지
한국사회 최초로 스스로 문을 닫은 시설이 되기까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구 석암재단) 산하 시설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과 임직원은 장장 12년에 걸친 투쟁 과정을 통과했다. 그 결과 2021년 3월 3일 모든 거주인이 탈시설을 마쳤고, 4월 30일 향유의집은 설립 3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향유의집을 폐지하기에 앞서) 탈시설 장애운동가들은 2009년 옛 비리 세력을 몰아내려 애쓰며 석암재단을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탈바꿈했다. 새로이 운영권을 쥔 이들은 시설 내부로 들어가 거주인들의 탈시설을 적극 지원했다. 그저 ‘탈시설’만이 아니었다. 거주인은 물론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직원들까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탈시설’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한때 120명 이상의 거주인을 거느렸던 대형시설이 폐지되기까지의 과정은 놀랍고도 험난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싸움이 시설 자체를 거부하는 지난한 투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재단 측의 비리와 횡령, 인권유린 행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시설에 복귀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2007~2008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거주인과 직원들은 거주인의 장애수당을 오랜 시간 갈취하고 각종 학대 행위를 일삼아온 석암재단 운영진 일가를 퇴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서는 장애 당사자 조직 ‘석암재단 거주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석암 비대위)와 직원 조직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공공노조 사회복지지부 석암재단지회’(석암 노조)가 꾸려졌고, 외부에서는 시민사회 연대조직인 ‘석암재단 비리척결과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석암 공대위)가 조직되어 비리 책임자 1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거주인들을 둘러싼 세계는 이미 손쓸 수 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2009년, 비리 척결과 인권 보장, 재단 이사진 전원 교체를 요구하며 싸우던 일부 거주인들은 문제가 해결되자 보란 듯 시설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시설은 인권이 보장되는 곳으로 거듭났고 장애인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라는 결말로 마무리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이날을 기점으로 급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향한 이들의 진짜 투쟁이 시작되었다. 
세계가 달라지는 시간: 집을 만드는 싸움을 시작하다
“그때 우리 내부에서는 형님들을 계속 시설에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모이고 있었어요. 아무리 싸운다 해도 그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투쟁을 하면 할수록 결국 대안은 시설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걸 더 절실히 알아갔어요.” (김정하)
2009년 6월 4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던 장애인 여덟 명이 시설을 퇴소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으로 향했다. 탈시설을 위한 노숙농성 채비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건 장애운동가들만이 아니었다. 수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공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들의 이삿짐을 확인한 경찰들은 금세 물러난다. 장롱 두 짝, 작은 냉장고 하나, 전자레인지 하나, 서랍장 하나, 옷가지와 이불, 자잘한 가재도구를 담은 종이박스가 전부인 초라한 세간들이 공원 한복판에 끌러졌다. 앙상했던 시설생활을 증언하는 살림살이였다. 훗날 ‘마로니에 8인’으로 불리며 두고두고 회자될 이들의 이름은 김동림(48세), 김용남(51세), 김진수(59세), 방상연(38세), 주기옥(63세), 하상윤(37세), 홍성호(56세), 황정용(53세). 대부분은 시설에서 20년 이상을 산 이들이었다. 
2009년 당시 마로니에공원 농성을 조직했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겸 프리웰 법인 이사장 김정하는 탈시설운동은 곧 ‘주거권운동’이라고 강조한다.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활동지원서비스, 소득, 집 세 가지인데, 이 중 가장 중요함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주거 공간이었던 것이다. 전장연과 힘을 모으기로 한 김정하 활동가는 석암재단 투쟁 당사자들에게 그 ‘집’을 함께 만들기 위한 싸움을 제안한다. 
2009년의 마로니에공원 농성은 바로 그 연대의 산물이다. 동시에 이는 먹고 자고 씻는 사소한 일상생활이 전부 문제가 되는 무모하고 전례 없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될 때까지 한다는 모두의 의지는 결국 ‘기적’을 이뤄내고 만다. 이들은 오세훈 시장과 접촉해 한국사회 최초의 탈시설 정책을 마련한다. 이로써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과 최대 5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 자립생활주택 도입 계획이 발표되고, 여덟 명의 중증장애인들은 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자립주택 평원재에 정식으로 입소하게 된다. 장애 당사자들과 비장애 활동가들이 노숙농성을 하며 매일 함께 밥을 지어 먹은 두 달의 시간이 일궈낸 쾌거였다.  
탈시설을 주도하는 시설의 탄생: 석암재단에서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바깥에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마로니에 8인이 박차고 나간 시설 내부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탈시설운동가들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영향력 행사 끝에 2009년 석암재단은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이름을 바꾸고 과거의 역사와 단절할 수 있게 된다. 장애 당사자들의 인권과 사회 통합을 기치로 내건 진보적 운영진들이 석암재단 측 비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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