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연대기

최경봉 · 인문학
4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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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연대기, 즉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보여 주지만,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을 짚으면서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한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에서의 한글 연대기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로서 한글의 모습’이라는 표면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 한글의 의미’라는 내면구조를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펼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과 그를 잇는 조선의 왕들이 한글을 널리 보급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는 ‘조선 왕조가 성리학적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한글로 백성을 교화했다’는 역사적 맥락의 연대기와 겹친다. 이 연대기의 내면구조에서 한글은 결국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던 한글은 근대화의 맥락에서 근대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저자/역자

목차

[1장]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였을까?―한글 창제와 보급의 연대기 [2장] 어떤 글이 한문을 대체할 수 있을까?―한문 해체의 연대기 [3장] 한글 신문으로 공론의 장을 넓히자―한글 신문의 연대기 [4장] 세계를 어떻게 한글로 기록할 수 있을까?―외래어 표기의 연대기 [5장] 한글 쓰기 원칙을 세우자―『한글 마춤법 통일안』까지 맞춤법의 연대기 [6장] 쉬운 맞춤법이 진리―한글 맞춤법에 대한 이의 제기의 연대기 [7장] 우리말 사전을 만들자―국어사전 편찬의 연대기 [8장] 세계에 한글을 알리자―한국어 세계화의 연대기 [9장] 글씨 쓰는 기계와 한글의 만남―한글 기계화의 연대기 [10장] 특수문자로서 한글의 재탄생―한글 응용의 연대기 [11장] 한글을 기념하다―한글날 제정의 연대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투쟁의 기록, ‘한글 연대기’ 이 책은 한글이라는 문자가 한국어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고 그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해 왔는가를 그려 낸 장대한 투쟁의 기록이다. 문자는 단순한 표기의 도구가 아니다. 문자는 종종 언어의 중추를 파고들어 언어를 변혁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사유와 삶마저 바꾸어 놓는다. 한글은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뚜렷이 일깨워 준다. 저자가 형상화한 강인한 물음과, 누가 어떻게 고민하며 분투했는가를 짚어 낸 사실의 정교한 자리매김이 이 연대기를 이루고 있다. 그 근간에 흐르는 저자의 사상은 한국어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에 놓여 있으며, 한글이 ‘우리의 언어’를 떠받친다는 신념이 책 전편을 꿰뚫고 있다. _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추천사’ 중에서 한글은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자요 한국어는 대부분의 동포에게 대체 불가능한 모어인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언어인데, 저자가 주목하듯이 그 둘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나름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한글 창제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한글의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 최경봉 교수의 이 책이다. 어문의 역사이자 한국어의 역사이며 일종의 사회사를 겸하고 있다. _ 백낙청 ‘추천사’ 중에서 우리에게 ‘한글’과 ‘한국어’는 같은 의미다! 한글과 한국어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하나는 글, 하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영어는 모두 라틴문자(로마자) 혹은 라틴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만이 ‘한글’이라는 문자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문자의 이름인 한글을 바로 한국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중세 조선만 해도 우리말의 짝이 된 우리글은 ‘한자’였다. 한자로 쓰고 우리말을 했다. 세종대왕이 1443년에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이 문자는 어디까지나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한 ‘훈민’(訓民)의 글자였다. 저자 최경봉 교수는 그의 다른 책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 의식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착종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우리말 공동체가 ‘한글’에 새겨 온 의미를 근대적 어문 개혁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며,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이 책의 서술 대상을 정했다. 이 책은 한글의 연대기, 즉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보여 주지만,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을 짚으면서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한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에서의 한글 연대기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로서 한글의 모습’이라는 표면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 한글의 의미’라는 내면구조를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펼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과 그를 잇는 조선의 왕들이 한글을 널리 보급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는 ‘조선 왕조가 성리학적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한글로 백성을 교화했다’는 역사적 맥락의 연대기와 겹친다. 이 연대기의 내면구조에서 한글은 결국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던 한글은 근대화의 맥락에서 근대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훈민’의 언어 한글, 작용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있다 1443년 12월 30일자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 한 대목이 실렸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긴요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였다.” 세종이 친히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글의 기원과 사용 원리와 특성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문자’(한자)에 관한 것과 ‘이어’(항간에 떠도는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간단한 28자를 전환하여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글자, 한글의 특성에 대한 서술은 곧 한글의 힘에 대한 첫 평가였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글 창제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세종은 교육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교육에 한글이 큰 힘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글은 세종이 기대했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힘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세종은 성리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쉽고 간편한 한글이 삼강오륜의 이치를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기대했겠지만, 한글은 삼강오륜의 이치에 반하는 지식과 사상(동학, 천주교 등)조차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글자였다. 한글은 백성을 가르칠 글자이면서 백성이 자신의 뜻을 펴는 글자이기도 했다. 한글을 배운 백성은 자신의 뜻을 펴는 데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한글을 창제한 후 6년이 지난 시점에, 한글은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정승 하연(河演)을 비난하는 한글 벽보가 나붙은 것이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에다 쓰기를, ‘하 정승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49. 10. 5.) 공론화를 위해 한글 벽보를 붙인 것을 보면, 그 벽보를 쓴 사람은 한글 벽보가 가진 파급력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상당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시기가 한글 창제 후 6년 만이었다는 건 한글의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글 벽보뿐만 아니라 한글 투서도 횡행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정조 임금은 민심이 동요하는 국면마다 한글로 유지를 내려 백성을 안심시켰다.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은 예언의 서적에 있지 않고 다만 교화가 시행되지 않고 풍속이 안정되지 않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이 도에서 발생할까 하는 것이다.……그들도 충성하고 싶은 양심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완고히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비밀히 유시한 글 한 통과 문인방(文仁邦)을 법에 따라 결안한 것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 써서 방면한 죄수들에게 주도록 하라.(『정조실록』, 1782. 12. 10.) 한글은 상하 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문자로 사용자가 가장 많았기에, 조선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되었다. 한문을 교육하는 데도, 과학 기술의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하는 데도 한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자였다. 중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널리 보급된 한글은, 근대화의 압력이 거세지는 시기, 근대 사회를 여는 강력한 도구로 새롭게 등장했다. 백성에게 삼강오륜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문자로 깊이 뿌리 내린 한글이 삼강오륜으로 상징되는 중세적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공론장의 주류 문자가 되었던 것이다. ‘계몽’의 언어 한글, 상처입은 민족의 자존심을 치유하다 한글의 힘에 대한 기대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까? 한글은 그 기대의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문자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세종을 포함하여 당시 사람들은 진서(眞書) 혹은 문자(文字)로 불렸던 한문과 한자에 대비하여,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렀다. ‘언문’이란 한문과 한자가 주류인 세상에서 한글의 쓰임은 비주류 영역에 국한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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