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를 가지고 해부를 했는데, 몸 한가운데 뭐가 있는지 알아?
간. 빛나는 간. 크고 아름답고 육중한 간. 싱싱한 간.”
부드럽고 둔탁한 메스로 원을 그리듯 헤집어
아무런 공허도 아픔도 없이 잘려 나간 세상의 한 단면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희곡집 시리즈 여섯 번째 도서로 동이향의 『간과 강』이 출간됐다. 표제작이자 2024년 국립극단 제작으로 무대화된 「간과 강」은 한순간 세계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정체 모를 징후가 작품 전반에 도사리고 있어 어딘가 낯설고 기이한 현실감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를 희미한 듯 잡히지 않는 미래는 일찍이 퇴색되었고, 과거와 현재도 전망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작중 인물인 L은 한강을 바라보며 시도 때도 없이 맥주를 마시거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집안에서는 싱크홀이 발생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도, 한강에서는 인어가 출몰하기도 하는 등 기묘한 사건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듯해 보이는 서사의 비논리적 전개에 저항하듯, L은 전 세계가 종말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는 깊은 회의감과 냉소 끝에, 찬란한 인어의 형상을 한 첫사랑 V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상투의 결말을 맞닥뜨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부조리감을 느낀다. 동이향 작가 특유의 정확한 현실 인식을 녹여 서사의 구조 속에 슬며시 흘려보냄으로써, 우리가 통상적으로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신파에 가까우며 낭만에 불과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절망감을 배가시킨 것이다. 이처럼 희곡집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허무맹랑한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대신,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삶의 보편성에 깊게 침잠하여 보다 구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현실의 내면에 움직이는 원리들을 하나씩 들춰낸다.
동이향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K-ARTS에서 “신화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역경과 고난의 의미, 깊은 공감대, 그리고 커다란 원형적인 힘들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인류’라는 한 사람이 겪은 어떤 기억들이 지금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먼 옛날 신화 속에서 한 번은 일어났던 일이고, 인류는 매일 그와 같은 인용을 거듭하며 수천 년 뒤에도 이와 같은 상황을 재연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당면한 현재와 미래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간과 강」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인류가 지구상에서 생물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상, 보다 진화하고 진보하는 동시에,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결국 퇴화하고 잃어갈 수밖에 없는 깊은 공허와 무의미함이라는 세계의 비밀을 결국 마주하게 될 것이다. 동이향 작가는 인류가 오랜 역사에 걸쳐 구축하고 축적해 낸 신화에 시선을 던짐으로써 지금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이야기들의 원형을 드러내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허구를 만들어 이 세계와 연결되기 위한 노력의 방식으로 이해와 위안을 제공한다.
이 희곡집 속 등장인물들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비현실’이다. 「내가 장롱롱메롱문을 열었을 때,」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부품화를 비판하고 그에 따른 대체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문제의식으로 국한 지을 수 없을 만큼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주제를 함축하고 그 의미를 반복하고 복제하고 변형하며 상징적 완결성으로 기어코 확장해 나간다. 작품의 줄거리는 남자 24가 다니는 회사에서 최근 2년간 23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회사에서는 그 이유를 찾아 직원들의 심리 상태를 조사하지만 끝내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결국 회사는 연쇄 자살 사건조차 자살한 직원의 숫자에 상응하여 창의적 인재를 채용한다는 통계와 연관 지음으로써 회사 브랜딩 차원에서 홍보하는 그로테스크한 결말로 내달리는 것처럼 일견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어둡고 매캐한 장롱이라는 비현실적 공간을 매개로 장롱문과 지하철 문 그리고 회사의 회의실 문을 넘나들며 해설을 쓴 박상현 극작가 겸 연출가의 표현처럼 자본에 의해 살해되는 공동체 식솔들의 모습을 중심으로 인간 복제와 연쇄 자살을 명분으로 상호 수렴하며 이는 시대를 관통해 영원히 순환할 것임을 암시한다.
「암전」은 극장과 로비라는 이중적 층위의 공간을 배경으로 경계를 허물기도 다시 세우기도 하며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으로서 전개된다. 극장의 로비는 사람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거대한 세계와 유사하고, 극장 내부는 현실의 극악무도함에 커다란 공포를 느끼고 현실로부터 탈출하여 숨어들 수 있는 안식처로 기능하는 듯하지만, 연극의 특정 대목에 이르면 공연을 뛰쳐나오는 중년 관객 H를 통해 극장 역시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또 하나의 극중극으로 작동하며 인물들에게 작은 경악을 안겨다 준다. 극장에서 일하는 직원 ‘이지혜’와 그녀의 유부남 연인 ‘민’ 그리고 그들이 근무하는 일터에서 어딘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 보이는 ‘노숙자’와 ‘정’을 통해 이야기를 교차하며 극의 내연을 심화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극중극은 전쟁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과 끝난 후 ‘암전’을 환기함으로써 「잊혀진 부대」의 전쟁터에 방치된 군인들처럼 현대인 역시 오늘날의 경쟁 과열, 양극화 사회로 인해 삶을 버티다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연극을 스스로 종식시키고 마는 오늘날의 자살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은 이분법적 인식 체계와 이원적 표출 양식 사이에서 시적 요소로 구성된 희곡을 쓰던 동이향 작가가 다시금 이야기의 원형으로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고찰해 볼 여지를 제공한다. ‘할아머니’라는 한 사람이자, 여럿인 신화적 인물을 인류의 대표로 내세워 아주 먼 옛날부터 아주 먼 미래까지 끝없이 출현을 반복하는 해와 달 아래에서 살아남아 살아 있고 살아갈 사람들의 일상을 휘영청 비춤으로써 영원토록 이어지는 아름다운 순환을 조명한다. 「지하철존재론」은 대도시 지면 깊숙이 설치된 지하철 노선과 같이 지하철 속 공간에서 마주친 익명의 존재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지각하고 포착한 것이다. 동이향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서사를 구축하는 서술적 기법을 한껏 달이고 달여 응축해 낸 작품으로, 몸과 말이라는 언어적 수단에 음향과 영상의 표현 매체를 덧씌워 한 편의 희곡으로 구현해 내었다. 여러 언어와 다양한 매체를 조립하여 구체적 의미를 갖지 않는 언어만의 언어, 즉 언어의 기하학을 완성해 냄으로써 동이향 작가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관객과 독자라면 그가 긴 기간 천착해 온 시적 감수성이 「지하철존재론」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