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더 빛나는 ‘오늘의 작가 총서’
한국문학에 출현한 새로운 무표정, 이장욱 첫 장편소설
연쇄적으로 일어난 세 건의 자살 사건
미세한 두통처럼 퍼져나가는 기이한 징조들
이장욱 작가의 첫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오늘의 작가 총서’ 38번으로 재출간되었다. 2005년 당시 10년 차 시인이었던 이장욱 작가는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가 이장욱의 등장을 두고 “우리 시의 미래에 이장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소설의 미래도 이장욱을 가졌다.”라고 말한 백지은 문학평론가의 찬사는 결과적으로 과장이 아닌 예언이 되었다. 이후 네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집, 두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과 성취를 한국문학사에 남긴 이장욱 작가에게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이토록 광대하게 뻗어 나갈 세계가 응축된 태초의 씨앗이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세 건의 연쇄 자살 사건을 중심으로 IMF 외환 위기 정국을 막 지난 2000년 초반 한국 사회의 풍경과 평범한 이들의 삶을 펼쳐 보인다. 이 시기는 경제적 붕괴로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 변화와 가치의 해체가 급속하게 일어난 시점으로, 사회적 불안과 절망이 팽배한 때였다. 이때 시작되어 현재까지 점차 극심해지며 이어져 온 양극화와 사회 문제는 곧 터질 폭탄이 되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정동을 민감하게 포착해 꿰뚫어보고 의문을 제기하는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고 첨예한 질문이 된다.
이장욱 작가는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에서 여지없이 냉소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언어, 불길하고 미묘한 파고를 끝까지 만들어 내는 문장의 리듬감, 광범위한 현실 인식 위에 치밀하게 설계된 초현실적 상상력으로 현실의 정동을 능수능란하게 담아낸다. 소설의 끝까지 독자를 따라붙는 불길한 징조는 뒤틀린 현실과 불행한 미래를 선명히 지시한다. 서늘하면서도 지적인 쾌감으로 가득한 이장욱의 세계, 그 태초의 현장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우리 앞에 다시 펼쳐진다.
■ 우연한 비극
어느 여름날 아침, 스크린 도어가 아직 설치되지 않은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가 달려오는 전철에 뛰어들어 사망한다.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소설은 나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장소를 거쳐 간 인물들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친정에 가는 엄마, 그의 남편, 지하철 기관사, 복권 판매소의 외팔이 주인, 동창의 장례식장에서 옛 연인과 재회한 남자, 실업 상태의 청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은 소설에서 또 다른 자살 사건의 당사자가 되거나 목격자가 되며 사건에 연루된다. 이들은 서로 완전한 타인이기에, 사건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아무 인과관계 없이 벌어진 일, 기괴하고 불행한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그렇게 인물들이 침묵하는 사이, 갑자기 시작된 비극은 어느새 기이한 징조가 되어 더 많은 군중들 틈새를 흘러 들어간다.
■ 초현실의 세계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의 인물과 장소 곳곳에는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평범한 아이 엄마는 몇 초 후의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고, 기관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모방 행동 증후군을 앓고 있으며, 무력해 보이는 복권 판매소 주인은 섬뜩한 비밀을 품고 있다. 자살자들은 사고의 순간, 물결의 파동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사고 직전과 직후의 모습이라는 두 개의 형상으로 목격된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에서 초현실적 경험을 한 인물들은 각자의 침묵 속에 그 기억을 감춘다. 누구도 그 경험을 사실로 믿어 주지 않으리라 예감하는 인물들의 침묵에서 우리는 다름 아닌 깊은 절망과 고독을 본다. 이장욱 작가가 설계한 불길하면서도 매혹적인 초현실의 세계, 현실의 그림자를 걷어 내고 조우한 우리의 절망과 고독은 낯설고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