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한계를 폴짝 뛰어넘는 시
무엇도 아니면서 모두가 되는 자유
독특한 상상력과 유머 감각으로 주목받아온 임지은의 두번째 시집 『때때로 캥거루』(문학과지성사, 2021)가 출간되었다. 평범한 일상을 생경한 꿈의 시공간으로 뒤바꾸었던 『무구함과 소보로』 이후 3년간 쓰고 다듬은 시편들을 한데 묶었다.
이번 시집에서 임지은은 존재의 고유성을 벗어나 시적 자유를 도모한다. 일반적으로 “주머니가 있는 동물”로 알려진 “캥거루” 중에서 “가끔 주머니 없는 캥거루가 태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식으로 대상이 기존의 정체성과 맥락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때때로 캥거루」). 해설을 쓴 김보경 문학평론가는 이러한 작법을 통해 “짝지어질 수 없다고,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진 것들”이 만나 “낯선 조합의 관계를” 새로이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적 대상을 익숙한 의미망에서 해방하는 것만으로 “편견을 피해 종류 없는 사랑이 태어”(「하루는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캥거루』는 존재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도이자 무한한 잠재성으로의 모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에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는 시인의 경쾌하고 재기 넘치는 도약을 보여준다.
형은 조언한다, 인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져보라고
실패는 반복할 수 있지만 늘 새롭다고
그래서 신비롭다고
―「러시아 형」 부분
“나는 몰라입니다 때때로 캥거루입니다”
임지은의 시 속 존재들에게 단일한 정체성이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모두 다른 지은」에 등장하는 세 명의 ‘지은’이 바로 좋은 예다.
한 반에 이름이 같으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이거나
지은 a, 지은 b, 지은 씨
성과 첫번째 글자까지만 불리거나
임지, 김지, 박쥐
특징을 찾아낸다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
―「모두 다른 지은」 부분
그들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위적으로 알파벳을 부여받거나 성과 첫번째 글자로만 불리거나 외적 특징을 강조당하는 식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구분은 혼란을 줄이고 질서를 확립하려는 기성 체제의 억압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시인은 지은들을 어떻게든 구별하려는 방식이 오히려 “지은을 양산해내고” “없는 지은을 창조해내기”까지 한다고 여긴다. 하나였던 명칭이 3의 제곱식처럼 증식되는 과정에서 고유한 정체성은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다. 변주를 통한 본질의 확장은 “네가 꾸는 꿈속에서” “내가 나를 찾”으러 다니는 「나의 행방」, 시인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문인들까지 “종이” “유리” “캔” “플라스틱”으로 등장하여 “우리는 뭐가 될지 모르지만 나아가야 한다고” 선언하는 「분리수거 낭독회」 등에서도 나타난다.
“빈칸이 많은 나에게 넌 쓸 곳이 많구나, 펜을 쥐여주었다”
그렇다면 기존에 없던 존재 가능성을 발견해나가는 작업은 어떤 식으로 거듭나게 될까. 시인은 명명을 통한 변주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 벽을 태연하게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이 상자는 제 것이 분명해요
열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소중한 것이 들어 있단 느낌이에요
[……]
여는 순간 아침이 밝아왔다
상자에는 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상자하고」 부분
이 시는 “받는 사람 없이” 택배가 도착했을 때 가족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작된다. 그들은 상자 안에 “소중한 것이 들어 있”으며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들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작 개봉했을 때 상자 안에는 “ ”이 들어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 문장은 상자 안에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비어 있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 무의미로서의 공허가 아니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무엇, 잠재성의 충만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물을 확인한 가족들은 각자 “어제”로 향하거나 “오늘”을 살거나 느리게 도착하는 “미래”를 지켜보는 식으로 서로 다른 양태를 취한다. 화자인 “나”는 “문 앞에 놓인 상자를 가지고 들어오며” 갑자기 “열린 사람”이 된다. 이렇듯 『때때로 캥거루』는 언어화될 수 없는 공백을 통한 대상의 변화마저 이루어낸다. 한계를 무한의 가능성으로 열어젖히며 한층 성숙한 시적 영역으로 발돋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