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은 도대체 몇 개인가?
“성은 두 개도, 세 개도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
이성애, 동성애, 인터섹스, 트랜스젠더…… 이런저런 성에 속해 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만 존재한다는 정상성의 오만함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신체 구조를 교정할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정상”.
‘두 개의 성’만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해체하자
성은 몇 개인가? 사람들은 “두 개!”라고 답한다. 과학에서도 “두 개!”라고 답한다. 두 의견은 다행스럽게도 일치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람들이 두 개의 성이 있다고 말할 때는 각각의 종마다 오직 두 유형의 개체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태양과 달이 존재하듯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별에 따라 역할도 규정된다. 여성인 어머니의 역할은 돌봄이고, 남성인 아버지의 역할은 통솔자인 가장이라고 말한다. 이런 틀에서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설명하고, 동물의 특성을 강조할 때도 이런 성별 고정관념이 투영된다.
그런데 과학에서 두 개의 성이 존재한다고 제시할 때 과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생물학자에게 ‘수컷’과 ‘암컷’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성의 수를 헤아릴 때 우리는 바로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별해야 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즉 여성과 남성의 두 가지 특성 계열에서 벗어나는 인간 개체는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치료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 논리로는 동성애도, 인터섹스도, 트랜스젠더도 모두 ‘비정상’이 된다. 두 개의 성에 포함되지 않는 성은 모두 비정상성을 부여받은 채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비상식적인 삶을 살도록 강제된다. 동성애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으므로 동성결혼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 트랜스젠더는 그들의 해부학적 성과 정신적 성 사이의 불일치를 스스로 조화시키도록 강요받고, 남성이라고도 할 수 없고, 여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인터섹스는 외과수술을 통해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저자는 ‘두 개의 성’에 갇혀 있는 사회를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은 두 개도, 세 개도 아니며,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즉 개인은 각자 재능이 있는 소중한 개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하지 그들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트랜스젠더인지, 인터섹스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명확히 두 개의 성, 남성과 여성만으로 구분될 수 없으며, 이성애자, 동성애자, 인터섹스 등 다양한 성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정의나 평등 같은 사회정치적 이상의 구현을 목적으로 건설되어야 하지, 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인간 개인의 삶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즉 ‘성은 두 개다’라고 주장하는 생물학이, 혹은 종교적 논의가 사회의 구축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인식론, 과학사, 페미니즘에서 빌려온 이론적 도구를 교차하면서 “두 개의 성”만 존재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을 해체한다.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여대에 입학하는 것을 막는 사례나, 동성애를 ‘찬성’ 또는 ‘반대’라는 잘못된 질문으로 묻는 사례나, 과잉대표된 종교인들에 의해 제기되는 ‘동성애는 죄’라는 주장에 정치인들이 호응하는 사례는 모두 ‘두 개의 성’이라는 이분법에 함몰된 시각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성 개념을 지배하는 주류 담론의 시각을 전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남녀의 이분법적 질서를 뒤흔드는 ‘인터섹스’
여기 이분화된 질서, 오로지 두 개의 성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동요시키는 존재가 있다. “명백하게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터섹스다. 인터섹스란 누구인가? 인터섹스의 존재는 굉장히 다양한데,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너무 작은 음경이나 비대한 음핵 또는 결절이 있는 고환이나 미하강(未下降) 고환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있고, 한 인간 개체가 XY 염색체와 여성의 성기 모양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있으며(테스토스테론 무감응 증후군), XX 염색체와 남성화된 성기 모양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선천성 부신 증식증). 그들의 존재는 남녀의 이분법적 질서를 뒤흔들고, 이런 질서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성의 이원론 모델을 지지하는 사람은 다음의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XX 염색체와 남성적 외형을 가진 경우, 이는 남성처럼 보이는 여성인가, 혹은 여성 염색체를 가진 남성인가? 또한, 이른바 “정상적 개체”라도 전형적 성 특징의 일부를 결여할 수 있다. 예컨대 생식세포 생산 능력은 생애주기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럼 여성과 남성이란 범주는 특정 생애 시기에만 적용 가능한 것이고, 모든 개체가 인터섹스 시기를 경험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러 성 특징 중 하나를 기준으로 삼아 여성과 남성을 구별할 수는 있다. 갓 출생한 아기의 성별을 판별하는 결정적 기준은 성기의 외형이다. 그럼 여성과 남성은 단순히 특정 성기 모양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을까? 인간 개체를 성기 모양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별증명서상의 성별 표시를 모두 없애자”
“인터섹스들이 존엄하고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끔 보장하는 일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공동으로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인터섹스는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이 사회에서 살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인터섹스 아동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규범에 합류할 수 있도록 여러 외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실패할 경우,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교정 수술을 받고 성을 재지정받았다. 가령 XY 염색체형을 가지고 있으면서 음경이 너무 작은 아이는 외과적 수술을 통해 성을 재지정받은 후 부모로부터 여자아이로 양육되었다. 반대로 음경 모양의 음핵을 가진 아이는 남자아이로 성을 재지정받지 않고 그대로 양육되었지만, 음핵이 너무 “음경처럼 보인다”고 판단될 때는 절단 수술을 받았다. 이렇듯 인터섹스 아동들은 일찍부터 어른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성을 재지정받았다. 성인인 경우에도 ‘비정상’으로 판정되어 갖은 불이익을 받기 일쑤였다.
이처럼 사회에서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인터섹스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긴다. 이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결합쌍둥이, 장애인 등도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즉 모두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고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젠더의 이원성에 기대어 있는 사회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성별증명서상의 성별 표시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한다. 즉 개인의 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장애가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게 ‘새로운 정상’이라는 주장이다.
자연주의, 반자연주의, 대안자연주의
이 책은 생물학을 관통한다. 생물학을 단순화하지 않고, 생물학의 풍부한 개념과 발견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생물학이, 즉 자연에는 두 개의 성만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회의 구성 방식에 너무 깊게 작용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생물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우리의 목표는 생물학을 사회질서의 구축에 이용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정의나 평등 같은 사회정치적 이상의 구현을 목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
저자의 이론적 틀은 대안자연주의다. 대안자연주의는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의 성과를 모두 수용하면서 제3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자연주의는 말 그대로 “사회에는 여성과 남성 두 개의 성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 생식세포와 남성 생식세포, 난자와 정자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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