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페미나상 수상작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
숲속 늙은 부부 앞에 나타난 학대당한 개 한 마리
그 개가 가르쳐 준 광대한 세계와 그 세계를 사랑하는 법에 관하여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클로디 윈징게르, 이 진실한 80대 여성 작가가 우리를 ‘부아바니(추방당한 숲)’로 초대한다. 노부부 소피와 그리그가 3년째 살고 있는 그곳은 배제의 고통으로부터, 쇠락의 외로움과 소멸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도피처이자 실패하는 사원이며 시끄러운 정원이자 고립된 꿈의 장소다. 어느 날 학대받고 도망친 개 “예스”가 등장하면서 타자들 사이의 용인과 환대가 그들만의 생태계 밖으로 확장된다. 무수히 다른 존재들의 경계 넘기는 자주 뭉클하고 더없이 시적이다. 엘렌 식수가 말한 “성(性)이나 종(種)의 경계를 정의해야 하는 곤경” 너머, 클로디 원징게르는 빙퇴석의 속도로 우리를 책임감의 의미에서 “더 큰 존재”이므로 더 크게 사랑해야 할 자리로 옮겨 놓는다. 그러므로 그 자리의 비문(碑文)이자 마지막 문장,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는 이 파괴적인 세계를 향한 최선의 다짐이자 사랑일 것이다. 텅 빈 기원과 창조된 타자에서 시작하는 모든 쓰기가 그렇듯이.
_김지승(『술래 바꾸기』, 『짐승일기』 작가)
2022년 페미나상 수상작
숲속 늙은 부부 앞에 나타난 학대당한 개 한 마리
그 개가 가르쳐 준 광대한 세계와 그 세계를 사랑하는 법에 관하여
세상과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늙은 부부 앞에 어느 날 학대당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난 후 두 사람의 일상과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감동적으로 그린 2022년 페미나상 수상작 『내 식탁 위의 개』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인 클로디 윈징게르는 올해 여든세 살의 작가이자 조형 예술가로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다. 70세라는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으나 그는 이미 1970년대부터 알자스 지방 보주산맥에 있는 방부아 숲에서의 삶을 이야기한 책들을 발표하고 또 이와 관련한 일련의 조형 예술 활동을 활발히 해 온,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예술가이다. 클로디 윈징게르는 히피 문화가 꽃피던 1965년 남편인 프랑시스 윈징게르와 소비 사회를 떠나 새로운 형태의 삶을 실험하고자 방부아 숲으로 떠나 60여 년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양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한편, 지의류를 염료로 만들어 양털을 염색하고 풀의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등 자연을 주제로 한 조형 예술 작품을 발표하고 글을 써 왔다. 첫 소설부터 발표한 거의 모든 소설이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른 윈징게르는 열한 번째 소설인 『내 식탁 위의 개』로 2022년 마침내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상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철저하게 비주류적인 윈징게르의 문학이 시대의 요청에 의해 중심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우리를 더 크게 사랑해야 할 자리로 옮겨 놓는 소설
소설의 제목 ‘내 식탁 위의 개’는 클로디 윈징게르가 정신적 쌍생아로 여기는 호주의 소설가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를 변주한 것으로, 우리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을, 그리고 우리 인간 중 가장 여린 존재들을 초대하는 환대의 부름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소설은 인간에게 유린당한 개 ‘예스’와 노부부 사이에 싹튼 놀랍고도 감동적인 우정을 통해 종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는 사랑을 그리는 한편, 하루하루 급격히 노쇠해지는 80대 작가가 탐사하듯 살아가는 노년이라는 시간과 매해 새로운 충격을 주며 무너져 가는 기후 위기 시대의 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섬세하기 그지없는 시적인 언어로 사유한다.
남성적 권위를 지닌 공쿠르상의 대안으로 여성 작가들에 의해 제정된 페미나상 수상작답게 『내 식탁 위의 개』는 주류에서 잘 다루지 않지만 지금 이곳의 문학이 이야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을 다룬다. 이 세계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가.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곳에서 물러나 다른 삶을 살았던 작가가 한 마리 연약한 동물을 만나 또다른 세상을 발견하고 세계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이야기를 읽고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선 현실을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물론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바라건대 어떤 이들은 조금 다른 삶을 꿈꾸고 어떤 희망까지 발견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작가 김지승의 말을 빌리면 “엘렌 식수가 말한 ‘성(性)이나 종(種)의 경계를 정의해야 하는 곤경’ 너머, 클로디 원징게르는 빙퇴석의 속도로 우리를 책임감의 의미에서 “더 큰 존재”이므로 더 크게 사랑해야 할 자리로 옮겨 놓는다.” 12월 최고 기온과 최다 강수량이 연일 갱신되는 이 겨울, 그야말로 모두의 생존을 생각하게 되는 날들 속에서 『내 식탁 위의 개』는 더 크게 사랑해야 할 그 자리에서 “이 파괴적인 세계를 향한 최선의 다짐과 사랑”을 결심하게 한다. 그것 말고는 우리 앞의 미래라는 시간과 미래의 문학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소설가인 ‘나’ 소피와 남편 그리그는 ‘추방당한 숲’이라는 뜻을 가진 ‘부아바니’에서 살고 있다. 서른 살이 채 되기 전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실험하고자 도시를 떠나 알자스 지방의 산속으로 들어온 지도 어느덧 60년이 되어 간다. 여든 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걷는 것조차 버거워져 그 좋아하던 하이킹도 호수 수영도 등산도 불가능해진 것은 물론, 얼마 전에는 크게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낮잠과 읽고 쓰는 것 외에는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그들 부부 앞에 어느 가을날 저녁, 목줄이 끊어진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인적 없는 산속이건만, 어디서 온 걸까? 짐승이 낯선 사람에게 제 배를 순순히 보여 주며 누웠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마지막 문장이 번개처럼 지나간다.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동물 학대범에게 유린당한 듯 생식기가 처참하게 찢긴 개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 찬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상처를 돌봐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지만, 곧 개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튿날 나는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서점 행사를 위해 리옹으로 떠난다. 산속에 묻혀 살지만 이렇게 소설을 발표한 후 독자들과 만나면서 세상과의 연결을 놓지 않는다. 대안을 찾기 위해 산속에서의 삶을 택했지만, 한 해 한 해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오늘 나는 여성이자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 변방을 대변하는 작가로서 발언하기 위해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행사는 영 불만족스럽게 끝나고, 나는 파업 때문에 연착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집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그리그만이 아니다. 이틀 전 사라진 예스가 돌아와 있다. 예스는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친밀감을 나타내고, 예스에게서 우리 인간과 대등한 태도를 발견한 나는 금세 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예스 덕분에 나는 영영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육체적 능력을 조금씩 되찾고 삶의 경이를 새로이 발견한다. 그리그 역시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예스와 함께 책을 읽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생의 황혼녘에 나타난 개 한 마리로 인해 단조롭고 무거웠던 노부부의 일상은 조금씩, 그러나 혁명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창밖 먼 산책로에 나타난 낯선 사람들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빠진 예스를 보고,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예스를 떼어 놓고 홀로, 노인에게는 모험이나 다름없는 탐사를 떠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