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베스트셀러 ‘경제사상가 이건희’를 출간한 허문명 동아일보 기자가 제2탄 격으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룬 반도체 신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이건희 반도체 전쟁’을 펴냈다. 이 회장 2주기인 10월 25일에 맞춰 출간되는 이 책은 1부 호암 이병철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2부 역대 대표적인 삼성반도체 CEO들의 증언을 통해본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암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1부 ‘호암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편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물론 삼성 직원들조차 반도체의 ‘반’자도 모르던 시절 호암이 어떻게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1970년대 앞이 보이지 않던 암울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최초 반도체 회사였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호암의 반도체 사업 구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내년 2023년은 1983년 호암이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VLSI) 진출을 선언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이며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1993년)을 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통해 한국 사회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로 가야 한다고 앞서서 주창했으며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결과로 말한 세계적인 경영자들이다. 남의 것을 뒤에서 쫓는 추격자에서 벗어나 맨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조직 문화·교육 방식·상상력을 모두 바꿔야 한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처럼 리스크가 큰 사업에 투자하다 삼성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주저하고 반대할 때 고독한 결단의 순간과 수없이 마주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사업을 밀고 나갔고 결국 큰 성과를 일구었다. 그것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개발 기간이 얼마나 걸리고 예산은 얼마나 투입되며 손익분기점은 어느 수준인지 등의 문제보다 반도체가 만들 세상에 대한 비전·가치·철학에 집중했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반도체 산업 삼성반도체의 전신은 1974년 1월 경기도 부천에 세워진 한국반도체다. 칩 설계에서부터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3인치(75㎜) 웨이퍼(반도체 칩 원재료가 되는 동그란 실리콘 기판) 생산 라인까지 전 공정을 갖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었다. 한국반도체는 시간을 숫자로 표시하는(그전에는 모두 아날로그 바늘이었다) 디지털 손목시계용 칩 생산을 목표로 출발한 회사였는데, 자금난에 처한 것을 알게 된 호암이 절반의 지분을 샀고 이후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털어 완전 인수하면서 삼성반도체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던 1970년대 말은 삼성이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호암은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이건희 당시 부사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수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증언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호암이나 이건희 회장 모두 반도체 사업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호암에게 끊임없이 사업에 대한 필요성과 영감을 불어넣은 것으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은 1970년 한국 사회가 미증유의 오일쇼크로 경제사회적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면서 막 PC 여명기를 맞고 있던 미국의 정보통신혁명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생전에 평소 임직원들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이른바 ‘업(業)의 개념’에 천착한 경영인답게 한국인의 젓가락 문화, 밥상문화,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문화에 기반 해 한국에서 반도체사업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대목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다시 보는 호암의 리더십 호암은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 산업국가였던 일본을 드나들며 사업구상을 많이 했는데 일본이 이미 차세대 먹거리로 중후장대가 아닌 ‘경박단소’ 사업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면서 반도체 관련 학자와 전문가 집단과 깊게 교류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반도체 사업의 가능성을 보았고 한국도 못할 것 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책에는 반도체 신화를 만든 초기 반도체 조직을 만들고 공정을 지휘한 김광호 전 부회장 등 대표적 전문경영인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이건희 회장도 생전에 “일본, 미국을 직접 다니면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사정하는 ‘기술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말을 직접 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호암은 73세라는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였다. 당시 제당, 모직 등 전통 제조업에서 전자 산업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택해 대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 최고 갑부로서 이미 이룩한 부富를 누리고 살아도 충분한 때에 호암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또 목숨을 건 일대 결단이기도 했다. 그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하기 수년 전 위암 수술을 하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언제 재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마무리를 생각할 시점임에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그의 고민은 호암자전에 잘 나와 있다. “수많은 미국과 일본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 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호암자전) ●공장 건설에서부터 기술추격까지 이룬 기적의 연속 1983년 2월 도쿄 선언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라는 최첨단 반도체 사업진출을 공식 선언한 뒤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하라고 지시하는데 현재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라 할 만한 기흥부지가 땅 매입에서부터 용도변경까지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초창기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리고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휴일도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전 직원들이 매달려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없던 클린룸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이어진다. 삼성은 64K, 256K 개발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86년 7월 13일에는 마침내 1M D램 개발에까지 성공한다. 개발에 착수(1985년 9월)한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1M D램은 꿈의 반도체 ‘킬로비트에서 메가비트 단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슈퍼 칩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곪고 있었다. 삼성이 야심차게 64K D램 양산을 시작한 1984년은 불행히도 D램 시장이 대폭락기로 접어든 초입이었다. 그해 말부터 세계 반도체 업계에는 최악의 D램 대폭락 사태라는 쓰나미가 덮친다. 미국과 일본의 설비투자 경쟁이 이뤄지면서 64K, 256K 공급과잉이 시작되자 일본은 덤핑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이른바 미일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미·일 고래 싸움에서 삼성은 새우는커녕 피라미 신세에 불과했다. 삼성 직원들에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와해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호암은 엄청난 반도체의 경영 손실을 안고서도 천문학적 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지옥의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외친 ‘돌진하라’ 호암의 기업가 정신에서 놀라운 사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상황에서도 반도체 개발을 독려하고 막대한 돈을 들여 2공장(1984년 8월), 3공장(1987년 3월)을 계속 지었다는 것이다. 다들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호암은 ‘올인 하라’고 했다. 생전에 적자만 보고 눈을 감은 호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