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온 거기에서 그 극지의 눈보라 속에서 너에게 미래를 부칠 수 있다면” 파쇄한 백지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책상 위에서 매혹과 참혹을 끝내 사랑을 위한 설계도로 남기며 김이듬의 아홉 번째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가 타이피스트 시인선 007번으로 출간되었다. 2001년 데뷔 이후 한국 시단에서 기성의 부조리에 저항하면서도 명랑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변방의 존재들을 위무하는 시 세계를 구축해 왔던 시인은 매 시집마다 불손한 감각과 아름다운 언어로 독창적이고 유려한 세계를 선보였다. 김이듬 시인은 김춘수시문학상 외 다수의 국내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0년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이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이듬의 시는 ‘내’게 허락된 안식처는 없다는 것,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서 돌아갈 스위트 홈의 불빛이 안 보인다는 것, 지금 쓰고 있는 이 시도 단 하나의 책상 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 이런 것이 김이듬의 시를 낳는 근본감정이다. “내겐 제자리도 기원도 없다.”(「크래시 랜딩」)면서도 그 기원을 찾아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시인은 떠나는 중이다.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블랙 아이스」 중에서 김이듬의 시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40년 만에 한국을 찾은 에밀리가 찾아간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을씨년스러운 세월을 따라 변한 장소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블랙 아이스」 중에서 에밀리의 옛집이 사라졌듯 내 기억 속의 엄마도 사라졌다. 내 앞에 있는 저이는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다. 집은 ‘나’가 태어나는 장소다. 집을 잃었다는 것은 내가 나라는 것을 보증하는 본원적인 느낌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낯선 느낌, 마치 이인증(異人症)을 겪는 것처럼 내가 아니라는 느낌, 나아가 나의 시는 내 바깥에서 태어난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 김이듬의 시가 태어나는 느낌이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 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밤엔 명작을 쓰지」) 파쇄한 백지가 흩날리는 책상 위에서 밤마다 시를 쓰지만 “내 몸은 투명하며 싸늘하다”. 김이듬의 시가 가진 매혹과 참혹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을 박차고 나가 극지 쪽으로 달음박질치듯” 시인의 시는 아름답고 비통하다. 날것 그대로의 희고 따뜻한 알의 탄생, 끝났다는 정착감 김이듬의 시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것은 비천하고 아름다운 삶의 자리다. 그다음 자리에 우리가 이르게 된 사연이 쓰이고, 마지막으로 우리 앞에 예비된 것이 무엇인가가 밝혀진다. 발견-회상-예견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이 시집의 흐름이다. 이 조류는 태초부터 날지 않았을지, 지상의 먹이들 놔두고 굳이 날 필요 없으니까 서서히 날개가 퇴화하여 날 수 없게 된 건지, 쓸 수 없는 날개는 왜 생겨난 건지…… 내가 새였을 때, 나는 고난이 오면 도피했다.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 버렸다. ― 「내가 새였을 때」 중에서 「내가 새였을 때」에서 시인은 “나는 사육장 안에 든 새”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나”는 사육장 안의 닭에게 모이를 주는 사람이었다가, 그렇게 “닭들”에게 포위을 당하는 사람이었다가, 마침내 새였던 전생을 기억해 낸다. “나는 고난이 오면 도피했다.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묶여 있다, 그러다가 이런 발견을 한다. 나는 짧게 날지도 않는다.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없다. 날것 그대로의 희고 따뜻한 알을 발견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정착감이 든다. ― 「내가 새였을 때」 중에서 닭장 속에서 발견한 이 “희고 따뜻한 알”이야말로 시인의 시가 아닐까. 이 난장 같은 세상에서도 저렇게 날것의 희고 따뜻한 탄생이 있다. 비운과 불운을 모두 챙겨 떠나는 시 어둠이 없는 데가 지옥이죠 밤에도 불을 꺼주지 않는 곳이 감옥입니다 70여 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아 명예를 회복한 할머니 수감 생활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머리 맞대고 뉴스를 본다 밥 먹으며 휴대폰 보는 습관을 나는 못 고쳤고 너는 스스로 만든 손목 흉터 가리려고 소매 잡아 늘리는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 ―「나의 정원에는 불타는 나무가 있었고」 중에서 이 세상에는 “70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아 명예를 회복한 할머니”가 있고, “스스로 만든 손목 흉터 가리려고 소매 잡아 늘리는 습관”을 가진 “너”가 있으며(「나의 정원에는 불타는 나무가 있었고」), 의사들이 파업하여 자리를 비운 병원 6인실에서 “자신의 유방을 꺼내 물수건으로 닦는 환자”가 있다. 그리고 이 사연들을 받아쓰는, “수술하다가 죽는다면 이게 마지막 메모”가 된다고 쓰는 시인이 있다.(「목동의 밤」) 세상은 비루하고 비참한 일투성이고 ‘나’의 삶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 모순된 삶 속에서 소외되고 불편한 기류들을 외면하지 않고 시적 체험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비록 지금 흐릿하고 얼어붙고 더러워졌다 할지라도, 시인은 한순간 빛났던 한 구절 때문에 한평생 다정하게 기다림을 사는 이들을 노래한다. 안녕 안녕 검은 새여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날 사랑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죠 비애와 불운을 모두 챙겨 나는 떠납니다 오늘 밤 늦게 도착할 거예요 ―「바이 바이 블랙버드」 중에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파쇄한 백지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길 위에 서 있다.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얼어붙은 길목 앞에서 비애와 불운의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나는 자이다. 이 고독은 세상과 엇물리는 자의 일방통행로이다. 그 일방통행로 안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새로운 시와 사랑을 발견해 나간다. 제자리도 기원도 없이, 누구에게도 사랑받거나 이해받지 못했던 이들이 영원의 동행을 하듯,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껏 그가 걸어온 매혹과 참혹을 끝내 사랑을 위한 설계도로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