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 결국은 대물림되는가? 그 질문에 실증적으로 답하다
이 책은 한마디로 ‘교육’에 관한 책이다. 더구나 굉장히 실증적인 책인데, 그것도 무척이나 미시적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해야 할 사실은 과연 미국 사회와 교육에 관한 책의 내용이 과연 우리 실정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사회적 배경과 제도가 다르긴 하지만 교육이라는 공통분모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책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범주화’와 앞에서도 말한 ‘실증’이다. 저자 아네트 라루는 미국 가정을 계층과 인종이라는 기준으로 범주화한 뒤 그들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간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이러한 범주화는 민감한 문제다. 라루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설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우리는 사회적 가치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요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오늘날의 부모 세대는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의 문화적 논리 아래에서 성장해왔음을 지적하며 ‘집중 양육 전략’은 현 시대에서 우위를 보이는 아동 양육의 문화적 논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두 번째 해석의 관점이 제기된다. 사회 구성원, 특히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부모 세대는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분인 동시에 사회의 논리와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회에서 자녀의 집중 양육 전략이 더 가치 있는 양식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이를 적용하는 계층이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출생과 동시에 이러한 배경 속에 놓이는 것이다.
책 전체를 정말 짧게 요약한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계층과 그렇지 못하는 계층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두 계층이 각각 서로 다른 자녀 양육 방식―집중 양식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저자의 문제 제기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러 미국의 사회적 조건들을 신중하게 검토한 후 피부 색깔에 관계없이 선정한 9세와 10세 아이를 둔 열두 가정을 중산층(상위 중산층 포함)?노동자 계층?빈곤층으로 나누어(구체적인 방법론은 이 책 2장을 참조하라) 심층 탐구하고 인터뷰한 결과, 문화적 구조에 불평등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정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모여 자녀 교육에 대한 문화적인 논리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각 가정의 차이는 의미 있는 유형으로 범주화(앞에서 이미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산층 부모들을 자녀 교육과 관련해 아이의 집중 양육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부모들은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각 계층에 따른 차이를 더욱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 열두 가정을 적절히 분리하고, 세 측면으로 나누어 양육 방식의 범주화를 시도한다. 1부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하여 계층적 특징들을 범주화하며, 3부에서는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양상들이 각 계층별로 어떻게 다른지 분석한다.
사회 계층적 차이는 아이의 일상생활 중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중산층 가정의 삶은 노동자 계층이나 빈곤층 가정의 삶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중산층 가정의 삶은 빽빽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돌아간다. 부모들은 이런저런 활동으로 정신이 없고, 특히 둘 이상의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들 각자의 활동이 겹치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느라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낸다. 이들 가정은 식료품이나 의류를 구매하고 자동차와 주택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의 일상 활동에 필요한 돈이 부족하지는 않다. 물론 이들도 경제적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하는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수준의 걱정이다. 이들 가정에서 자녀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수백수천 달러를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중산층 부모는 아이들에게 많은 야외 활동을 시키고, 이러한 활동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들 가정에서 모든 스케줄은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형제자매들은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붙어 다니고, 부모에게 여가 시간이란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른의 공간에서 어른의 지도를 받으며 보낸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로운 여가는 연이어 잡혀 있는 일정 사이에 틈틈이 끼어 있는 자투리 시간이 고작이다. 중산층 가정의 일상은 자녀의 흥미와 학교 밖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가정의 하루는 중산층 가정과 사뭇 다르다. 우선 그들은 중산층 가족이 느끼지 못하는 경제적 문제로 고민한다. 특히 빈곤층 가정의 하루는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난다. 엄마는 오르지 않는 월급으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먹여 살릴 걱정을 하느라 밤을 지새우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아이들의 빨래거리를 공용 세탁소까지 들고 가느라 길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엄마의 아침은 막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씻겨 학교에 보내느라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이들 역시 부모의 경제적 사정을 눈치 채고 있다. 돈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일도 흔하다.
경제 사정은 좋지 않지만 아이들의 삶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의 삶은 중산층 아이들에 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밖으로 나가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으며, 친척을 만나 노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일부 아이들은 학교 밖 생활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자녀만큼은 아니다. 학교 밖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경제적 사정이나 교통 불편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이 때때로 집에서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신의 재능을 뽐내더라도, 어른은 그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자녀를 학교 밖 활동을 하는 장소까지 자동차로 태워다주거나 조직 활동을 지도해주는 경우도 드물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의 자녀는 전반적으로 부모에게 예속되지 않은 생활을 한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아이들은 이웃의 또래 친구와 어울려 놀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스스로 채워나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른들 세계와 아이들 세계 사이의 구분은 더욱 명확해진다.
요약하면, 사회 계층의 차이는 아이가 참여하는 학교 밖 활동의 수나 가족생활의 흐름, 가족의 경제적 고민, 자유롭게 놀며 보내는 일상의 시간, 자녀의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녀의 예속 정도 등의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사회 계층의 요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성별의 차이 역시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 비해 한층 정적인 놀이를 즐기며, 집에서 먼 곳까지 가서 노는 경우도 적다. 물론 인종적 차이 역시 중요한 고려 요인이다. 특히 인종에 따라 나뉘는 주거 단지 구성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인종의 친구만 사귀도록 만든다.
2부를 보면, 각 가정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언어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6장과 7장에서 만나는 두 가정의 사례는 언어 사용 방법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알렉산더가 속한 흑인 중산층 가정은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사용한다. 이들 가족은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즐기며, 언어 사용 자체에서 본질적 즐거움을 찾는다. 단어의 여러 의미를 토론하기도 하고, 부모는 언어를 자녀 훈육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보통 광범위한 토론과 협상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작은 투덜거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부모의 이런 양육 방식 덕분에 알렉산더는 풍부한 언어 소통 능력을 얻는다(더 자세한 내용은 6장 참조). 반면 다른 가정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