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사에서 대리기사가 된 ‘지방시’
천박한 욕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 대리사회를 해부하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만들며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마치 자신의 차에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타인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 역시, 결국 이 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나 명성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대리인간’으로 존재하는 이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와이즈베리 신간《대리사회》는 그러한 공간에서 저자가 익숙하게 체험한 3가지 통제(행위, 말, 생각)를 바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대리사회에서 한 인간은 더 이상 신체와 언어의 주인이 아니었고, 사유까지도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었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린다고 해도 저자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사회 여러 공간에서의 경험에 따라 ‘순응하는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사회의 ‘대리인간’이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우리에게 주체로서 한 발 물러설 것이 아니라 경쟁하고 남보다 한 발 더 나아가기만을 강요해 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괴물이 되고 있다.
2015년 말《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첫 책을 통해서 저자는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통해서 대학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임을 다시 확인했다.
천박한 욕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 대리사회를 해부하다
육아, 교육, 직업, 소비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기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도로를 질주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동을 걸기 전부터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샅샅이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잠시 내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균열의 지점을 찾을 수 있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단속 카메라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고,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음에 다시 도로로 올라오면서도,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계속 운전대를 잡는다. 그렇게 대리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된다.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내심 바란다. 대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할 ‘대리국민’을 양산해 낸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이 책의 저자가 그랬듯 밀려나고 나서야 자신이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밀려난 개인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대리인간이 들어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포위한 ‘대리올로기’의 서사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 장착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내비게이션은 우리의 삶을 은밀하게 통제해 왔고 그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해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에 취해 살아왔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대학을 떠나 카카오 대리기사가 된 저자는 세상 그 자체가 거대한 강의실과 연구실임을 깨닫고는 가장 좁은 공간에서 우리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지나온 ‘대리의 시간’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생생한 언어를 기록한 것이다.《대리사회》에서 저자는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시스템과 마주하라고 주문한다. 외면하고 침묵하지 말고 온전한 나로서 사유하는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고 주변의 또 다른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경계인’에게만 보이는 것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우리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그 구성원 중 하나라는 환상에 빠진다. 그러한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뿐 아니라 그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실체를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중간자’이자 ‘경계인’이었다. 대학원생 조교로 학과사무실과 연구소에 있으면서,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면서, 계속해서 경계를 넘나들었다. 경계에 서면 중심부나 주변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균열’이다. 조직의 시스템이 가진 어느 균열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중심부에 다가서서 그것을 곧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지만 경계에서 멀어질수록 그 균열은 점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고 나면 그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제는 주체로서의 감각을 회복하고 순응하는 몸에 반역해야 할 때다. 스스로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괴물에게 주체로서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며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국민의 대리(대표)로 선출된 한 개인이 또 다른 누군가의 대리로 지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국정운영 전반에서 의료 처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주체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대리인간’에 불과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았던 그는 지금 대리사회의 괴물이 만든 공간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숨기면서 스스로 물러서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삶의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그는 선택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