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면서 _ ‘G2시대의 비망록’ , 병자호란
권력을 쥐고 자신감이 높아지다
숙부와 조카의 숙원宿怨|‘반정反正’이 성공하다|“금수의 땅이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이 되었노라”|숭명배금崇明排金의 열기가 고조되다|명,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호기를 잡다
권력을 빼앗길 뻔하다
동요하는 민심, 권력을 지키려는 조바심|이괄, 거병하다|인조의 공주 파천과 이괄의 서울 점령|춤추는 민심과 이괄의 몰락|실추된 권위, 흉흉한 분위기
‘친명’의 질곡 속에 사라진 개혁 의지
정권 보위에 모든 것을 걸다|‘은 먹는 하마’가 나타나다|개혁 시도가 흐지부지되다
모문룡에게 코가 꿰이다
모문룡, 조선의 ‘갑甲’이 되다|날로 심해지는 ‘은인’의 작폐|‘밀수 왕초’, ‘해외천자’의 사기 행각
명은 지고 후금이 떠오르다
명의 말기적 증상|요동의 방어선이 무너지다|원숭환, 누르하치를 제압하다|홍타이지, 칸汗이 되다|홍타이지, 후금의 전열을 재정비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홍타이지의 승부수|인조, 강화도로 피신하다|아민, 화의를 제의하다|조선, 후금의 ‘아우’가 되다|북쪽과 남쪽의 의병|서북 백성들의 비극과 모문룡의 사기 행각
자괴감, 위기의식, 그리고 무대책
‘오랑캐’와 화친한 자괴감이 커지다|그치지 않는 모반과 역모들|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하다|표방은 있으되 실천은 없다
일본의 기가 되살아나다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원수’, 절호의 상경 기회를 잡다|‘공허지국’ 조선, 상경을 허용하다
명, 자멸하기 시작하다
모문룡의 본질이 폭로되다|‘국제 사기꾼’의 최후|홍타이지, 허를 찌르고 반간계를 쓰다|‘장성’이 무너지다
‘샌드위치’ 조선, 가도 정벌을 시도하다
조선, ‘샌드위치’가 되다|모문룡의 죽음과 조선|‘1629년 황성 기습’의 여파와 조선의 진퇴양난|유흥치의 반란과 조선의 가도 정벌 해프닝|유흥치의 역공과 죽음, 코가 꿰인 인조
동상이몽 속 흔들리는 형제관계
후금의 무역에 대한 갈망|개시 문제를 둘러싼 파열음|명사처럼 대접받고 싶었던 후금 사신들|후금, 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후금, 조선을 떠보다
대릉하성의 비극
홍타이지, 대릉하성을 포위하다|부메랑이 된 홍이포|조대수의 투항과 홍타지이의 배포
조선, 내우외환에 신음하다
‘청북 포기론’에 민심이 동요하다|원종 추숭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다|후금의 엄포에도 가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기세등등한 후금, 명을 흉내 내다
후금, 대조선 정책을 확정하다
후금은 다시 배를 요구하고, 조선은 절교를 결심하다|공경孔耿, 반란을 일으켜 후금으로 귀순하다|조선, 고래싸움에 다시 휘말리다|군사력의 균형이 무너지다|후금, 조선을 ‘손 안에 든 물건’으로 규정하다
노유녕과 강학년
또 다른 ‘중원의 대도’가 입국하다|강학년,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리다|이어지는 충돌, 훈수하는 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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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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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목차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국제전쟁으로서 병자호란을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通史
● 광범위한 사료 섭렵을 통해 확보한 학문적 엄밀성과 전문성
●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 일본사의 자료와 연구 성과까지 흡수하여 확보한 시야의 국제성
● ‘과거’이자 ‘역사’로서 병자호란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반면교사로서 승화시킨 문제의식
● 복잡하고 전문적인 역사적 사실을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재구성해낸 스토리텔링의 매력
병자호란, ‘과거’가 아닌 ‘현재’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
1675년(숙종 1) 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74년, 오매불망 고국으로의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봉황성으로 압송해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단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병자호란이 남긴 고통의 그림자가 길고도 길었음을 새삼 절감한다.
참담했던 병자호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병자호란의 결과는 참담했다. 국왕이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고 붙잡혀 끌려갔다. 38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었던 안단의 비극이 웅변하듯 피로인被擄人들(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은 특히 처절했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 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청의 침략 가능성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병자호란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낼 수 있을까?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매진해온 저자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1.2》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로 자리 매김한다.
저자가 《서울신문》에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서 저자는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명과 청이라는 패권국 사이의 ‘조선’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을 교차시킨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Group of 2)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그리고 G2세력의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두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병자호란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의 참상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세세하게 살피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동시 출간된 병자호란 소설 그리고 강좌,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 높이다
저자는 지난 10월 3일부터 EBS 역사특강에서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라는 제목으로 병자호란 관련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부인 유하령은 돌아갈 ‘조국’이 없던 조선 포로들 ‘화냥년’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전쟁 포로로 끌려간 이들의 지난했던 삶을 섬세하게 그린 《화냥년―역사소설 병자호란》을 썼다. 《역사평설 병자호란》과의 동시 출간이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이다.” 이 강좌와 소설이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병자호란의 현재적 의미, 병자호란을 ‘G2시대의 비망록’이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함의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조 정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파탄을 드러내다
병자호란이란?
주지하듯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 뒤 후금後金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거기에 조선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이 후금과의 실리적 외교를 제한했다. 문제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차 세력을 키우던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은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은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 철기鐵騎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행했다. 치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더욱 처참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화냥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병자호란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다.
인조, ‘정권 안보’에만 급급
조선은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다. ‘끼어 있는’ 약소국이 자존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병자호란과 인조 정권의 행적을 돌아보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먼저 ‘정권 안보’에만 급급했던 인조 정권의 난맥상을 지적한다. 인조반정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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